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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Dec 31. 2021

매달 100km 챌린지 해도 살찌더라

꾸준히, 그리고 대부분 구질구질했던 1년간의 챌린지 도전


작년 마지막 날. 나는 한겨울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10km 러닝을 완주했다. 운동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귀찮은데 내일 하지 뭐'하고 차일피일 미룬 결과물이었다. 지난 30여 년간 뭔가 새로운 걸 시작하면 초반에만 불타오르다가 끝은 흐지부지되는 타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늘 하듯이 '하루에 10km는 못 뛰는데? 어쩔 수 없지 뭐'하고 흐지부지 포기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번에는 그냥 넘기기엔 뒤끝이 찝찝했다. 30년을 넘게 미루고, 대충 하고,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외면하는 삶을 살았더니 이제 그것도 싫증이 난 모양이다. 아무튼 무지하게 추웠던 그날, 나는 수많은 갈등 끝에 남은 챌린지 거리를 채우기 위해 공원으로 나갔고, 거의 기어가는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래를 들으며 흥을 올려보려다가 나중에는 귀가 너무 시리고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거슬려서 소리를 끄고 무음으로 달렸다. 휭휭 부는 바람을 들으며 내가 했던 생각이 다 떠오르진 않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말이 있다. '진짜 죽겠다. xx 다신 미루지 말아야지'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어쩌다 보니 올 겨울도 백수로 보내고 있고, 별 탈 없이,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일도 없이 한 해가 또 가고 있다. 12월의 마지막 러닝을 끝내고 올 한 해 내가 채운 러닝 배지들을 살펴봤다. 가장 큰 수확은 한 달에 100km 뛰기 챌린지를 한 달도 빼먹지 않고 완수했다는 것이다. 지난 일 년간 별별 상황에서 이거 하나만은 지켜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것이 생각나서 매우 기뻤고, 조금 찝찝했고, 약간 실망스러웠다.


1년 전에 계획을 미루지 말자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깨달은 후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만은 꼭 지키려고 노력했다. 시간 여유가 있고, 운동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달에는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일이 바쁠 때는 정말 채우기 어려웠다.


여러 달 중에서도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던 어느 달이 가장 기억난다. 그 시기는 내가 준비하던 프로그램이 한참 바쁘게 촬영과 방송 준비를 병행하던 때였다. 유난히 일이 바쁘고 몸이 무거워서 마지막 날까지 6km가 넘게 목표 거리가 남아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서 막연하게 퇴근해서 채울 생각이었는데, 마침 또 회의다 뭐다 일이 많아서 밤 11시까지 회사에 붙잡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속이 타들어가는데 러닝 때문에 집에 보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반포기 상태였었다. 그런데 11시 직전에 '일단 오늘은 들어가자'라는 선배의 지령이 떨어졌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방을 챙겨 들고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과연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남은 거리를 채울 수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걸 성사해낼 수 있을지는 나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재빠르게 어플을 켜고 뛰고 걷기를 반복했다. 집까지 갈 시간은 없었으므로 회사 주변을 미친 듯이 돌고 돌았다. 방송가들이 모여있는 상암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사방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도 많다. 아는 얼굴을 마주칠 확률도 매우 높았지만, 나에게 선택에 여지는 없었으므로 노트북을 넣은 에코백을 어깨에 바짝 매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열심히 걸었다. 아마 남들 눈엔 한밤 중에 팀에 비상이 걸려서 급하게 회사로 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도저히 뛸 여건이 안 되는데 그래도 걷는 것보단 뛰는 비율이 높아야 정해진 시간 안에 챌린지를 채우는 게 가능했으므로 미친 듯이 달려 아슬아슬하게 챌린지를 성공할 수 있었다. 자정이 넘은 후에 퇴근을 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이걸 제대로 된 러닝이라고 할 수 있나?''이렇게 채우는 게 의미가 있어?''도대체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 의문스러웠지만, 어째튼 기록은 남았으니 됐다 생각하며 퇴근했다.


이쯤 되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정당한 방법으로 챌린지를 완수하지 못했다. 챌린지의 목적을 살려 완수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운동 외의 시간에도 어플을 켰다. 심할 때는 일할 때도 어플을 켜놨었는데, 지방으로 촬영 장소 답사를 가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어플을 켜고 돌아다녔다. 정확히 수치를 재보진 않았지만 제대로 운동한 기록 7 : 치팅 3 정도 비율이 되는 것 같다. 치팅없이 순도 100% 운동으로는 도저히 100km를 채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꼼수로 빠져나가는 기록이 많으니 러닝이 내 삶을 바꿔 놓은 건 많지 않다. 살은 오히려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했을 때 7kg가 늘었고 체력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밤샘 작업하는 게 수월해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챌린지를 완수하고 나면 기분이 굉장히 좋았고 다음 달에는 꼭 여유롭게 규칙적인 운동으로 채우자 다짐하지만 그다음 달에도 말일쯤 되면 '아 진짜 하기 싫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보통 이런 챌린지를 완수하다 보면 챌린지 완수 그 이상의 것을 배운다고 하던데 애석하게도 챌린지를 채우는 것도 버거웠던 나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올 한 해는 과정보단 목적을 이루는데 집중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자책하고 끝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름 처음으로 장기 프로젝트를 성공했으니 긍정적인 방향도 있긴 하다.


우선 나도 끝까지 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원래 무엇을 하든 초반에 불타오르다가 곧 흐지부지되는 타입이었는데, 억지로 끌고 가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한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매년 세웠던 계획에 실패했던 이유도 깨달았는데, 내가 완수할 수 있는 목표의 크기를 몰라서였던 것 같다. 내 그릇이 간장종지라면, 힘을 내서 소주잔까지 채울 수 있어도 맥주잔은 무리인데 지금까지 그걸 몰랐다.


내가 완수할 수 있는 목표의 크기를 가늠하고 나니 포기하고 싶을 때도 스스로를 달래는 효율적인 방법을 알게 됐고, 그 덕에 지금에 이른 것 같다. 이제 한 번 해봤으니 다음에는 아주 조금씩 범위를 넓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그럴듯한 계획도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면서 얻는 개운함에 익숙해졌다. 치팅을 쓰던, 죽상을 쓰던, 나를 어르고 달래서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전까지와 비교되지 않는 산뜻함이 느껴진다. 단점은 이 산뜻함을 느끼는 시간이 매우 짧아서 얼마 안 돼서 금방 까먹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건데, 그래도 이 산뜻함을 느끼는 빈도수가 늘어나니 정말 하기 싫다가도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더 많아졌다. 지금 싫은 걸 조금만 참고 견디면 개운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큰 매력이다.


마지막으로 노력한다고 꼭 긍정적인 결과가 오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1년간 목표를 지켜가면서 막연한 상상을 했었다. 1년 챌린지를 지킬 때 즈음엔 몸매도 날씬해져 있고, 나도 엄청난 성취감을 깨달은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는 과정은 지루했고 끝은 허무했다. 태생이 게으른 인간을 억지로 문 밖으로 끌어내서 뭔가 하긴 했는데, 성적표를 받고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1년간 운동을 안 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살은 더 쪘고, 여전히 백수고, 내 삶이 긍정적으로 변한 건 하나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모를까 시간과 노력을 들여놓고 나니 더 악화된 것 같아서 괴로웠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남들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구 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속상했다.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이걸 깨닫고 나니 속상한 마음을 넘어 새로운 게 보이기 시작했다. 원하는 결과가 있다면, 무작정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맞는 타깃 설정이 필요한데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뭘 얻어보려고 노력한 일이 별로 없으니, '노력'만 하면 모든 게 알아서 긍정적으로 잘 풀릴 거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효과는 오지 않을 때가 많다. 정확히 원하는 목표가 있다면 그에 맞는 타깃 설정부터 했어야 한다. 물론 완수하는 과정도 그 목적에 맞게 진행되어야 하고. 노력하는 나, 포기하지 않은 나는 칭찬해줄 만 하지만 열심히 살았다고 원하는 걸 모두 얻는 건 별개의 일이란 걸 이제야 깨닫는 중이다.

친구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나이에 나는 나를 키우고 있다니,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1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한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지만 내면에서는 많은 것을 얻었고, 이 교훈을 가지고 다음 해에는 아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1년 전엔 12월 31일 날 10km를 채우겠다고 울며 뛰었지만, 지금은 하루 전날 모든 러닝을 끝내고 마지막 날은 편히 쉬면서 이렇게 글을 정리할 수 있는 레벨이 됐으니까. 내년에는 순수하게 운동만으로 100km 채우기 챌린지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매우 힘들겠지만, 1년 전의 나도 같은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노력한다고 다 잘 되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노력하고 안 되는 나]에 취해 평생을 살 텐데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내년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노력하는 나]로 살아야지.

우린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지부진하지만 늘 해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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