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지데이지 Jan 26. 2019

요즘 청년의 진짜 고민

경쟁사회 속에서 의미있게 살기

<말모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삶의 안위함과 목숨까지 버린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영화가 끝난 후, 불이 켜진 영화관을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실존했던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에 분명 감사했지만, 그보다 뚜렷한 목적을 갖은 사람들만의 뜨거움과 동지애가 부러워서였다.


사람은 삶에 의미를 필요로 하며, 먹고사는 것 이외의 greater cause를 찾았을 때, 엄청난 힘과 아름다움을 발휘한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장강명의 "표백"은 우리가 완성된 사회를 살고 있다는 전제 하에 사건을 전개한다. 이는 미국의 정치학자 F.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인해 "역사는 종언하였다"라고 말한 바와 같은 맥락이다. 그보다 200년 앞선 칸트는 인류사회의 최종 목적은 인간 자유의 실현이라고 말했고, 헤겔은 더 나아가 역사 속에서 사상의 체계가 내부의 모순 때문에 붕괴되고 보다 모순이 적은 체계가 등장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결국 근원적인 모순이 없어진 상태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장강명은 모든 것을 이룬, 역사가 끝난 그 시대가 현시대라고 본 것이다.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를 지적해도 이미 답이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장강명, 표백


현시대는 싸워야 할 나라도, 지배자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지란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어딜 가나 살벌한 개인전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진정한 우정에 장애물을 놓는다.


시험 결과가 나오는 날이면 친구들 사이에 자부심과 우월감, 질투와 열등감이 묘하게 엇갈린다. 나의 한국 학창 시절 기억에도 그 불편한 날이 자리 잡고 있다. 외고 입시를 준비하던 같은 반 친구가 나보다 점수가 안 나오자 나와 말도 섞기 싫어한 것이다. 나는 그 이후 기말고사 공부를 안 하고 시험을 망쳐버렸다. 잔인한 경쟁구도에 대한 반항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다행히 그해 여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만약에 내가 한국에 남았더라면 대학은 갔을까 의문이 든다. 배움의 과정보다는 결과를, 팀워크보다는 개인의 독함을 장려하는 시스템은 뿌리부터 건강하지 못하고, 그에 걸맞은 열매를 맺는다.


"표백"에 나보다 더 극단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세연은 이 시대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자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살사이트를 만든다. 동조하는 무리가 생겨나고 회원은 30만 명을 넘어간다.


우리의 역사는 자유의 실현을 위한 싸움의 연속이다. 그런데 나라와 개인의 자유가 최정상을 찍은 지금, 작품 속 청년들이 그로 인해 자살을 택한다. 이는 좌절감에 시달리는 이 시대 청년들의 현실을 반영한다. 경쟁과 그 무의미함에 고통받는 것은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이다. 작품은 세상이 새하얗고 온전하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를 의심하게 한다. 이 시대의 체계에도 분명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싸움일까? <말모이>를 보며 다시 한번 확인한 사실은 타인을 위한 마음, 즉, 사랑만이 우리의 땀과 눈물에 의미를 준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이 그 선상에 있다. 정환(윤계상)과 판수(유해진)가 서로를 생각할 때 느끼는 깊고 뜨거운 감정은 함께 사랑의 길을 달려가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죽은 뒤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역사에 남고, "말모이"같은 영화의 소재가 된다. 삶의 의미는 홀로 멀리 갈 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한 걸음을 갈 때, 찾아진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싱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