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고슴도치
갈수록 진실하게 친구 사귀기가 너무 어렵다고 느낀다. 깐깐한 기준을 거둬들이고 남에게도 나에게도 관대하고 싶다. 10대에 배워야 했던 우정의 법칙들을 30대 중반에 배워가는 중. 인정 욕구와 마이웨이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데 겉으로는 쿨한 척하려다가 가끔 병이 난다.
캠핑은 문제가 아니었다. 캠핑카도, 무계획 여행도 모두 다 해본 일이어서 겁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목적지는 나의 유년시절 고향인 제주. 그렇다면 나는 이 여행에서 아주 여유롭고 느긋하게 모든 이들을 잘 챙겨주는 일만 남은 것 같아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주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로 '친구들이랑 잘 못 어울리면 어떡하지?'였다.
이게 왠 새 학년 올라가는 초등학교 2학년 같은 걱정이란 말인가? 말하기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나는 나이 30이 넘도록 친구 사귀기를 제대로 못 배운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알다가도 모를 게 친구 사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때는 나도 사교계에서 좀 날렸었다. 첫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문화예술+비영리계의 인싸들 100명을 모아 2박 3일 놀고먹으며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다소 요상한 컨퍼런스를 기획하고 운영했었는데 뭐, 그때는 나름 반응이 좋았다. 100명 안에서 새로운 관계도 생기고, 협업도 일어나고 그러면서 그 중심에 있었던 기획자인 나에게도 많은 관심이 쏟아졌었다. 나는 한껏 흥분했었지만 한편으론 두려웠다.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만일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나에겐 관심을 갖지 않겠지? 날 좋아하지 않겠지? 그래서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을 총동원하여 나에게 있지도 않은 패를 필사적으로 꺼내보였다. 하지만 이게 오래갈 리가 없다. 무엇보다 내가 지쳐버렸다.
한 번의 큰 계기도 있었다. 당시 일하던 회사는 스타트업이었는데 우리 회사 대표의 멘토 격이던 스타트업계의 큰손(...)이 젊은 창업가들을 제주로 초대해 서로 사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가짜 패를 너무 많이 자랑한 탓이었을까? 나를 너무 키워주고 싶었던 우리 대표는 그 자리에 생뚱맞게 나를 보냈다. 그곳은 상당히 냉정한 세계였다. 처음엔 모두에게 골고루 질문이 오갔다. 무슨 일 하세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두 번째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당시 한창 SNS에 회자되던 미디어 스타트업, 중국을 오가며 비즈니스를 하고 있던 패션 스타트업, 이미 너무나 유명한 게임을 성공시킨 회사, 그리고 스타트업들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모 기업 대표 등등을 중심으로 그룹의 역동이 자리 잡는 동안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홀로 와인을 들이키며 박탈감과 싸워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서서히 '셀럽'들의 세계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희로애락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 사람의 성취, 야망, 성공 가능성에만 관심이 있는 세계, 그래서 끝없이 '나는', '나는', '나는'으로 시작하는 대화의 향연. 실은 나는 이렇게 작고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내보여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은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년째인 것 같다.
캠핑 얘기하는 줄 알았더니만 웬 사람 얘기만 잔뜩 하냐고? 이번 캠핑에 대해 말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사람이 거의 다라서 그렇다. 처음 캠핑 아이디어를 제안한 •행동대장•은 멋짐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여성이다. •행동대장•과 나는 일을 하다 만나게 된 사이었는데 작년에 여행을 하다가는 LA에서 그녀의 집에 이틀이나 신세를 지기도 했다. 같이 해변에도 가고 클라이밍도 하고 많은 것을 했지만 왠지 모를 일말의 어색함이 나에게 남아 있던 것은 역시 그녀의 너무 멋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나에게 흥미가 떨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 (이 자리를 빌려 •행동대장•에게 처음 고백해본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함께 모은 캠핑 크루들도 다 으리으리한 친구들이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나 또 작아지면 어떡하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위축되어 쪼그라들거나 오히려 과도하게 부풀려질 나의 작고 소중한 자아가 염려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캠핑이 끝난 지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도 여행의 설렘을 도저히 잊지 못했던 나는 아침 일찍 서울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노트를 꺼내 이런 메모를 했다.
나조차도 반신반의했던 새로운 친구들과의 2박 3일간의 캠핑여행은 너무나 좋은 추억과 가능성, 에너지를 남겼다. 때로는 새로운 관계가 더 안전한 관계가 된다.
모든 사람은 매 순간 새로운 존재이다. 하지만 오직 그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 앞에서만 그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내게 사랑을 준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2박 3일, 제주에서의 캠핑카 트립을 하는 동안 나에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여행을 가기 전에 직장동료들에게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캠핑을 간다'라고 했더니 굉장히 의아해했었다. 나도 내가 너무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건가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나에겐 행복의 핵심이었다. 행복이라는 말이 조금 식상하다면 '회복'이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나를 새롭게 보아주고 질문해주고 감탄해주는 그 눈빛과 그 마음들 때문에 나는 잊고 있었던 나의 가치를 다시 깨달을 수 있었고 좀 심하게 말하면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처음 제주에 도착해서는 정신이 없었다. 제주에서 하나밖에 안 남은 업체라며 사장님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캠핑카는 많은 것이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만난 네 명의 여자들은 친해지기와 여행하기를 동시에 수행하느라 온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쓰고 있었다. (나는 그랬다.) 그 와중에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무계획 여행(이라고 쓰고 운명적으로 멋진 풍경과 함께하는 낭만적 캠핑여행)을 실현해내야 하는 미션을 앞두고 있었다. 이런 우리가 조금 안쓰러웠는지 하늘이 우릴 도와 어렵지 않게 멋진 첫날의 정박지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시험은 그때 찾아왔다.
오는 길에 들러서 찾아왔어야 하는 장작을 까먹고 그냥 지나온 바람에 •행동대장•과 •허당•이 캠핑카를 몰고 장작을 찾으러 가버렸다. 나와 •마미손•은 칠흑 어두움 속에 아담한 캠핑체어와 함께 남겨졌다. 처음으로 둘 만의 대화를 하게 된 나와 •마미손•. 솔직히 말해서 그때 •마미손•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처음 질문을 던지던 내 마음은 기억이 난다. '일은 어때?'라고 질문하면 어디까지 얘기해주려나? '결혼 생활'에 대해 묻는 건 실례일까? 내 이야기는 과연 궁금해하려나?
여기서 나의 첫 번째 무장이 해제되었다. 유난히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눈빛을 가진 •마미손•은 조금은 수줍은 듯한, 하지만 머뭇거림이 없는 목소리로 상투적 수준을 넘어선 자기 경험을 이야기해주었다. 내 가슴은 쿵쾅댔다. 아, •마미손•이 여기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내게 물어왔다. •고슴도치•는 어때?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아마 처음보다 훨씬 크고 흥분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낡은 캠핑카가 장작을 싣고 돌아올 때까지 30분을 바닷바람을 견디며 어둠 속에서 서로의 눈동자를 불빛 삼아 •마미손•과 •고슴도치•의 우정이라는 책의 첫 페이지를 제법 다정하게 시작했다.
다음 날, 따뜻한 밤의 기억만큼이나 눈부신 아침 바다를 선물 받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이 완벽한 정박지를 찾아낸 나는 다행이라는 마음에서 조금 더 나아가 쬐금 우쭐한 마음까지 들려고 했다. '너희들을 금능해수욕장이라는 신세계로 인도한 나를 찬양하라~'. 하지만 친구들과 아침 산책을 하다가 나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실세계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리액션으로 준비모임에서 이미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던 •허당•이 아주 명랑하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작년에 여기 혼자 왔을 때보다 너희들이랑 이렇게 같이 오니까 훨씬 더 좋다!!"
•허당•은 이미 금능해변을 여행해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왜 충격이냐. 내가 이제까지 만나본 사람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상식에 의하면 보통 이런 경우 어젯밤에 이곳에 도착해서 모두들 이런 곳이 있었냐며 흥분하고 환호할 때 이미 알은체를 했어야 했다. '금능 좋지? 나도 여기 와봤어~ 여기 좋아. 저쪽에 가면 뭐가 있고 쫌만 걸어가면 뭐가 나오고.' 하지만 •허당•은 그러지 않았다. 그에겐 네가 아는 걸 나도 안다고 알려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젯밤 굳이 그걸 드러내지 않고도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두 번째 와보는 곳이지만 '이번엔 우리와 함께 와서 다르다, 새롭다'라는 발견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게 너무 충격이었고 겨울 답지 않은 아침 햇살에 외투 한 겹을 벗음과 동시에 내 자아를 보호하고 있던 갑옷도 하나 더 벗어버렸다.
이런 순간들이 2박 3일 동안 수도 없이 더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공기가 우리를 내내 둘러쌌다. 이게 내가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위와 같은 글을 쓰게 된 이유였다. 서른 넘어 새로 만난 이들과의 진실한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나는 불신했다. 하지만 사실은 간절히 믿고 싶었다. 그리고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선물처럼 받아버렸다.
이 글은 WBC@Jeju에 참여한 나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더 많은 여성들을 자기 돌봄의 세계로, 우정과 연대의 세계로, 자연을 탐험하는 세계로 끌어들이는 유혹의 서사로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지독히 시니컬하고 두려움 많았던 내가 이번 캠핑 크루들과의 2박 3일 여행을 통해 우정을 다시 믿어 보고 싶은 17살의 소녀로 거듭났다면 무엇의 공이 가장 컸던 걸까?
내가 이번 글의 주제를 관계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하자 친구들이 '맞아, •고슴도치•가 잘 챙겨줬지, 잘 물어봐줬지.' 이런 말을 했다. 나 사실은 그때 되게 초조했던 건데,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보였구나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속마음이야 어땠든지 간에 내가 챙겨주고, 물어봐주고 했던 것들이 친구들의 마음의 빗장을 여는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빗장 열린 친구들이 보여준 속 마음이 또 내 빗장을 열고.
이번 멤버들이 유난히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멤버가 아니었다면 이런 여행이 불가능했냐 하면 그것도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멤버를 엄선한 것도 아니었고 제주라는 목적지도, 캠핑카라는 수단도, 무계획 여행도 모두 돌아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이 우연한 변수들 중에 뭔가 하나 이번과 같지 않았다면 나는 좋은 경험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새로운 눈을 가질 준비가 된 사려 깊은 여성들과 함께 아늑한 곳을 박차고 나와 불확실한 자연이 선사하는 모험에 몸을 맡긴다면, 그 시공간을 고유하게 채워나갈 우리들의 창조성을 믿는다면 언젠가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이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 많은 여성들을 유혹해 자연 속에서 함께 우연을 맞닥뜨리며 불가능해 보이던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멀리 멀리 탐험해보고 싶다.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돌보는 밀레니얼 여성들의 베이스캠프, Women's Basecamp(WBC)는 자연을 사랑하고 아웃도어를 즐기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입니다. 자연 속에서 생활해 보는 ‘캠핑’을 매개로 쉼을 되찾는 라이프 리트릿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WBC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womensbasecamp를 팔로우 하세요!
제주 캠핑카 여행 시리즈 글은 WBC Seoul 팀이 2/14-16에 파일럿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다녀온 내용을 바탕으로 각 크루들의 언어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