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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Jan 23. 2017

센티미엔또 갈리시아

스페인 갈리시아에서의 일주일 2


둘 째날 아침. 원래 첫째 날에 예정되었던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향했다. 도시를 거닐고 있는데 세자가 지나가던 중년의 여인과 알은체를 한다. 옆에 있던 미카엘도 두 팔을 벌려 놀랍다는 행세를 하는데, 알고 보니 이 여인은 미카엘과 세자가 만났던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이자벨. 인구 7,710명의 작은 마을 비미앤쪼 지천에 세자의 지인이 널려있었던 것이야 이해가 어렵지 않지만, 경상남북도를 합친 크기인 갈리시아의 수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한복판에서 이 여인을 마주치게 된 우연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세자가 차 안에 열쇠를 두고 문을 잠가버린 사고가 있었을 확률(참조), 그래서 우리가 산티아고 방문 일정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확률, 그 외에도 그녀와 우리를 그 시간과 공간에 데려다 놓은 다른 모든 선택들과 그들의 확률이 쌓아 올린 우연.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 타령을 하지 않았다면, 혹은 우리가 그녀를 만나기 직전 오른쪽 대신 왼쪽의 골목을 선택했다면, 그냥 엇갈렸을지 모를 그 찰나들. 수많은 결정과 가능성들이 어쩌다 우연을 낳았는데 '우연'이라는 단어 자체는 그 신비함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것 같다. (내 주변의 이들을 만나게 된 것도 다 그들과 나의 선택과 그 선택을 내렸을 확률과 많은 다른 요소들이 뒤섞인 조합의 결과라면, 언제부터인가 이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내 오만은 겨우 우리를 이어놓은 우연으로썬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겠다. )



별난 우연으로 마주친 그녀와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정착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야고보의 유해가 매장된 곳으로 유명한 산티아고 대성당 (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을 둘러보고, 화이트 와인을 마시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무슨 홍상수 영화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못해본) 그렇게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우리는 다 같이 해가 넘어갈 때까지 술을 퍼마셨다. 글라스에 청명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행위에 퍼마셨다는 동사는 좀 그렇지만 사실이 그랬다. 글라스만 소주잔이 아니고 술만 좀 고급 져서 그렇지 종로 3가 허름한 고등어 집에서 생선 뜯어먹으며 소주 들이켜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우리 대화의 반은 이해할 수 없는 스페인어로 이루어지고 이자벨의 독일어가 (초보인 나에게조차) 굉장히 베이비 수준이었지만 그녀가 갈리시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을 때는 고백하건대 좀 감동을 받았다. 세자의 어설픈 독일어 번역과 그녀의 바디랭귀지 사이에서 이해한 토막은 누가 물으면 그들은 스페인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갈리시아인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허스키하고 낮은 그녀 특유의 목소리와 주름 가득한 얼굴로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치면서 힘주어 센티미엔또! 갈리시아!라고 하는 모습은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았다. 참고로 센티미엔또(sentimiento)는 영어 센티먼트(sentiment)와 비슷한 말인 듯해서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사전에 검색해보니 '감정' 외에 '정서, 정감'이나 '심통, 애통함'이라는 의미까지도 지니고 있으니, 그때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읽었던 자부심과 긍지 외에도 약간의 슬픔, 애달픔이 잘못된 해석은 아니었나 보다. 


사실 갈리시아는 409년에 세워져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María Cristina de Borbón-Dos Sicilias) 섭정 여왕에 의해 1833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하나의 독립된 왕국이었다고 한다. 현재 갈리시아는 스페인 자치 지방의 하나로 라 코루냐(La Coruña), 루고(Lugo), 오렌세(Ourense), 폰테베드라(Pontevedra) 4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갈리시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갈레고(Galego)로 에스파냐어보다는 포르투갈어와 더 가깝다. 주도는 갈리시아 왕국 때부터 주요 도시였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이다. 천년이 넘게 자신의 문화와 땅을 지켜내던 그들이기에, 스페인이라는 나라 내 하나의 지역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갈리시아에 가지는 그들의 애착과 자부심이 수긍이 간다.



여행 중에 들은 이야기는, 자부심과는 별개로 갈리시아인들이 이민을 많이 간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세자가 데려다준 바다에서 가만히 수평선을 들여다보니, 저 너머에 뭐가 있을지 호기심이 들 법도 했다. 세자에 의하면 몸에 전사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그들이, 세상의 끝에서 도전정신과 모험심을 지니고 바다를 건널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 싶었다. 갈리시아를 떠나고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은 나의 낭만적 상상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지형적으로 갈리시아 내부에는 언덕이 많고 기후적으로는 비가 자주 내리고 온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형과 기후로 인해서 역사적으로 축산업과 농업은 갈리시아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바스크나 까딸란과 같이 다른 스페인 지방에서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갈리시아는 비교적 고립된 촌락 사회로 남아 자급 농업(subsistence agriculture)과 어업이 여전히 주요 경제적 수입원이었다. 갈리시아는 농업 부문이 스페인에서 가장 뒤처진 지역의 하나가 되었고 농장의 생산성은 개인 농장들의 작은 규모로 매우 저해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갈리시아는 스페인 인구의 수출지나 다름없었다. 1900년과 1981년 사이의 갈리시아 출신 이민자는 825,000명을 넘었고, 프랑코(스페인의 독재자, 1936 – 1975 집권) 시기에는 다른 유럽 국가들(특히나 프랑스, 스위스, 독일 그리고 영국)으로 이민하는 이들이 늘었다. 또한 남아메리카는 스페인 외에 갈리시아 후손의 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나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그리고 브라질 같은 나라의 몇 백만이 갈리시아 이민자의 후손이라고 한다. 



라 꼬루냐에서 만난 세자의 매부 카를로스는 우리를 한 베르무트(vermouth) 바에 데려갔다. 이자벨과 세자로부터 받았던 인상을 바탕으로, 까를로스에게도 갈리시아가 독립을 원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한사코 부정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이 계속해서 스페인다운 것을 침범한다며 유럽연합에서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유럽연합이 존재하기에 자유롭게 스위스로 건너와 돈도 버는 세자 생각을 하니 아이러니하다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지금까지 보고 느낀 이곳 사람들의 갈리시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결국 사랑하는 자신의 땅에서 희망을 찾을 길이 없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의 향수에 불과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자기 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숨길 줄 몰랐던, 떠난 자와 또 남은 자의 애착이 어딘가 닮아있는 듯도 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세자를 보고 있으면 가끔 답답하기도 했고, 더 솔직하자면 그를 스위스에 돈을 벌러 온 스페인 출신의 어떤 사람 이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세자로 시작해 세자로 끝난 이 여행에서, 단지 한 꺼풀에 대한 해석 외의 모든 다른 것들은 차단시켜버린 나의 스테레오타입과 편협함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3분 간격으로 지인과 마주치는 그의 작은 고향,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갈리시아 음식, 수다에도 열정적인 그가 모국어로 나누는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가 만났던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 라 코루냐에서 작지만 멋진 바를 하면서 갈리시아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동생 미구엘,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동생 마리엔느와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그래픽 디자이너 매부 카를로스, 볼리비아의 젠더 관련 엔지오에서 활동하는 막내 동생 돌로레스. 이제 그에게서 갈리시아 사람들의 친절하고도 열정적인 인상에 더해, '인구 수출지'라는 슬픈 그들의 역사가 아른거릴 것만 같은데, 이게 결코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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