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섬광같은 한국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몸서리 쳐질 정도로 추운 날씨와 후두를 공격하는 초미세먼지로 내내 기침을 달고 다니면서도 ‘그래도 서울이지~!!’라 외쳤던 휴가였는데요.. 맑은 날씨도, 깨끗한 공기도 아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로마가 문득 떠올랐던 때가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전 포스터
몇몇 친구들이 뒤샹전 오프닝을 간다며 들떠있는 모습을 보고 아니.. 나는 로마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도 보았던 뒤샹인데..? 하며 조금 잘난 척을 하고는(ㅋㅋ) 내심 풍요롭고 일상적인 유럽의 예술문화가 그리워졌습니다.
그리곤 언젠가 미래에 한국에서 특별전을 열 또다른 작가가 누가 있을까- 하는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다 마르셀 뒤샹과 비슷한 시기에 초현실주의 작품을 남겼지만 아직은 낯설게 느껴지는 한 이탈리아 화가를 떠올렸습니다.
조르조 데 키리코 (Giorgio de Chirico 1888-1978)
스페인의 살바도리 달리, 바르셀로나의 호안 미로, 벨기에의 르네 마그리트 등 초현실주의작가로 딱 떠오르진 않지만 사실 그들보다 좀 더 앞선 시대를 이끌었던 작가 조르조 데 키리코입니다.
그리스에서 태어나 20대 초반까지 독일과 프랑스 각지에서 예술적 학문을 쌓았던 키리코. 입체파를 대표하는 파블로 피카소와 동시대에 파리에서 활동하며 '젊은 세대의 가장 놀라운 화가' 라는 극찬을 받아 명성을 얻습니다.
하지만 1915년, 세계대전의 여파로 키리코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 북부지역 페라라로 이주하는데요. 이 시기에 평생 여행을 자제하고 한 지역에만 거주하며 스스로를 감금하며 내적 고요를 유지했던 작가 조르조 모란디 (Giorgio Morandi)를 만나 형이상학적 작품에 대해 논하기도 했습니다.
1910-1920년대 작품
국립현대미술관 조르조 모란디전 포스터
모란디 역시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특별전이 있었던 작가입니다.
자그마한 방에 앉아 좁은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화병과 물병의 배열에 매달렸던 모란디도 참 매력적인 작가인데요. 그의 많은 작품과 생가는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모란디와 달리 키리코는 젊은 시절 어느 한 곳에서의 정착생활 없이 그리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 국가의 여러 도시들로 삶의 터전을 옮기며 생활하였는데요. 그러한 이력을 보면 그의 작품 속 불안함이 느껴지는 공간과 길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비춰지는 외로움, 공허함과 같은 추상적 감정이 결국 그의 내면과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 스크롤을 올려 그의 작품 속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마치 그의 심볼과 같은 아치형 회랑과, 건축물!이 바로 그것인데요.
이는 훗날 로마의 한 건축 디자인에 큰 영감을 줍니다.
palazzo della civiltà italiana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로마 시내로 들어오는 공항 버스에서 꼭 눈에 띄는 건물이죠? 국제 박람회 개최를 위해 건설되었으나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43년 완공 이후에도 원래의 목적으로 개장하지 못하고 뚜렷한 용도없이 사용되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FENDI의 본사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사 건물에 영감을 받을 FENDI의 패션쇼 스테이지는 이렇게 만들어지죠..
FENDI 2015 s/s in Milano
더불어 영감의 시초, 키리코 작품으로의 회기까지..!
FENDI 2015 f/w in Paris
독창성은 사려깊은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철학자 볼테르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림을 넘어 건축을 패션까지 예술이라는 큰 카테고리 속 여러 장르에 영향력 미쳤던 키리코.
젊은 시절 여러 도시를 전전했던 생활을 끝내고 이러한 말을 남기며 1944년 로마 스페인 광장에 정착하여 1987년 생을 마감할때까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They say that Rome is at the centre of the world and that Piazza di Spagna is in the centre of Rome. therefore, my wife and I would indeed be living in the centre of the centre of the world.”
Giorgio de Chirico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고, 스페인 광장이 로마의 중심이기에 나와 내 아내는 세상의 정점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90살까지 살았던 키리코의 말년의 작품에서 젊은 시절 보였던 불안감이 조금은 사그라든듯한 느낌이 듭니다.
우주의 중심, 세상의 중심 로마에서 어쩌면 젊음보다 더 큰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를 키리코.
아직은 낯선 화가이지만 언젠가 한국에서 그의 특별전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으며 글을 마칩니다.
키리코의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