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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빛 Aug 01. 2019

어릴 적 베프를 찾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가 되었을까

몇 년 전 SNS에 올라왔던 후배의 푸념이 떠오른다. 예전에 같은 부서에서 지냈던 회사 후배 C는 아기를 키우느라 싱글인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 같다며 힘들고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 나는 이렇게 댓글을 썼던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스테이지에 사는 것 같아. 인생의 큰 변화를 겪을 때마다 스테이지가 바뀌고, 나이와는 크게 상관없이 스테이지가 같은 사람끼리 공감하고 말이 통하는 거 아닐까. 아마 네가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서 그럴 거야. 친구들도 언젠가 겪게 되겠지만 그때는 너는 또 다른 스테이지에 가 있겠지."


누군가는 40대에 아이를 품고, 또 누군가는 20대에 아이를 키우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를 품는 일 또한 새로운 스테이지라고 한다면, 나는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이 스테이지에 들어섰다. 물론 스테이지의 순서에는 정답이 없다. 그 사실을 알기에 늦게 발을 들였다고 조바심을 내거나 잰걸음을 걷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앞서 임신을 경험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은 덕에 처음 닥치는 일도 익숙한 양,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저 임신 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참이었다. 


일찍이 아이를 학교에 보낸 친구도 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도 있었으니 어쩌면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미묘한 균형점을 찾으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스테이지가 바뀌었다고 해서 예전부터 동고동락하던 친구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선을 긋기는 싫었고, 또 먼저 그곳을 거쳐 간 친구의 충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도 내 상황에 그다지 맞 않았다. 서로 다른 의견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나다운 스테이지를 만들고 싶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기 옷은 선물 들어올 테니 많이 사지 마."라는 말을 듣고 임신 기간 내내 작고 귀여운 옷을 보면서 구매 욕구를 억누르다가 결국 "눈에 어른거리는 예쁜 건 사야 돼."라며 출산 직후에 마구 지르는 식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가 떡볶이를 먹자고 하는데 "임신하면 매운 거 먹으면 안 되는데."라며 유난을 떠는 것도 별로였다. 


스테이지가 달라진다는 것은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는 의미다. 그런데 나는 그 변화가 되도록 내 삶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변화라는 물방울이 내 삶이라는 연못에 떨어지며 일으키는 물결이 360도로 퍼져나가면, 내가 사는 세상의 구석구석에 가닿아 나를 뒤흔들어 놓을 것 같았다. 혼자서는 그 물결의 파장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이 변화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 스테이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물론 이 스테이지를 먼저 지나간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 이 시점에 내가 느끼는 것처럼 머리 위에 설렘과 걱정으로 뒤덮인 혼란 구름을 뒤집어쓰고 있을,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 문득 어릴 적 베프라고 불렀던 친구 S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얼굴. 그리고 처음 만났던 그 얼굴. 그렇게 두 개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니까 내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신발주머니를 운동장 스탠드에 세워두고 새 학년 맞이 개학식을 했다. 개학식이 끝난 후 신발주머니를 다시 찾아 교실로 들어가던 차.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한 아이 하나가 두리번거리며 자기 신발주머니를 찾고 있었다. 내가 왜 그 아이의 신발주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그 아이의 신발주머니를 들고 가 그 아이에게 갖다 줬다. 그 아이가 고마워하며 내 눈을 바라보며 이름을 물었다. 그 아이는 S라고 했다. 그 인연으로 우리는 베프가 됐다. 알고 보니 같은 아파트 옆 동이었던 데다가 둘 다 남동생이 있는 첫째였다. 우리는 검은 테 안경을 썼고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공통점이 많았고,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말이 잘 통했다. 둘이 죽고 못 사는 그런 친구가 됐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아이에서 여자가 되었고, 또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 직장 때문에 지방으로 전학 갔다 다시 서울로 전학 오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린 시절에 찾아온 변화를 두 손 잡고 헤쳐나갔다.


그런데 내 인생에 또 다른 변화가 닥치던 어느 시점에 S가 갑자기 사라졌다. 재수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느 날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S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이였다. S와 연락이 혹시 닿느냐고. 나만큼은 S와 연락하고 있을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S와 연락이 닿지 않았고, S의 뜻을 존중해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리라 믿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전화번호를 바꾸고서도 한참 동안 착신 전환 기능을 유지했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기억의 흔적마저 희미해질 정도가 됐다. 언제인가 삶이 공허할 때, 옛날이 그리울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힘든 일이 있을 때, SNS에서, 검색 엔진에서 그 아이 이름을 무수히 검색했다. 어디서도 S를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그 아이를 찾으려고 얼기설기 얽혀 있는 인터넷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더듬어 풀려고 하지는 않지만, 인생의 장이 바뀔 때면 앨범을 꺼내 우리 집 피아노 앞에 나란히 서서 활짝 웃으며 찍었던 사진을 손끝으로 더듬는다. 


임신을 하고 나니 자꾸만 생각의 끈이 길어진다. 이유를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굳이 흔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외로워서인 것 같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나누고 싶어도 이미 먼저 겪은 이들은 부연 안갯속으로 희미해져 가는 기억일 테고, 겪지 않은 이들은 이 고통을 들어봐야 눈코입 모두 닫고 느껴보는 것일 테니. 그럴 때마다 과거에 스테이지를 함께 했던 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S는 지금 어떤 스테이지에 있을까. 엄마가 되었을까. 나처럼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을까. 아니면 아이 없이 살고 있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헤어지지 않고 연락을 이어왔다면 어땠을까.


"작별 인사에 낙담하지 말라. 재회에 앞서 작별은 필요하다. 그리고 친구라면 잠시 혹은 오랜 뒤라도 꼭 재회하게 될 터이니." - 리처드 바크


이 문장을 읽으며 울렁거리는 마음을 눌러본다. 언젠가 S를 다시 만날 때쯤이면 우리가 같은 스테이지를 걷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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