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립 Sep 12. 2020

[책]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비대면이 만들어낸 '조각난 시공간의 감각'

얼마 전, 안 지 4년 된 지인 A와 크게 싸우고 척을 졌다. 싸운 이유는 말하기 부끄럽게도 ‘나를 정말 좋아하느냐’였다. 지인 A는 항상 자신이 먼저 연락하고, 보자고 말하는 데 지쳤다고 했다. 자신을 정말 친구로 생각한다면 연락도 먼저 하고, 자신이 정말 힘들 때 한두 번 정도는 일을 취소하고 와야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이미 취업도 했고, 집안형편도 넉넉한 A가 상황이 정 반대인 나를 배려하지 않은 채 연락과 만남을 강요하고, 그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만나는 시간과 장소도 다 그에게 맞추고, 그를 보기 위해 실제로 만나는 서너 시간 외에도 몇 시간을 더 투자하는데 연락 빈도를 이유로 화를 내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말다툼은 ‘냉각기를 가지고 나면 나에게 사과하게 될 것’이라는 A의 말로 끝이 났다. 나는 한 달이 넘도록 그의 메신저에 답하지 않고 있다.     


싸움의 기저에는 서로의 시간에 대한 다른 감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일을 다 마치고 연락을 할 때 그 사람은 일을 막 시작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빨리빨리 일을 처리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다른 사람도 나에게 반드시 그래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SNS, 메신저처럼 비대면을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은 이런 ‘시간의 차이에 대한 감각’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책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의 첫 장 ‘비대면’은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로 각광받는 소위 언택트(비대면)가 시간의 차이에 대한 감각을 무뎌지게 만든다고 말하며 이는 돌봄 노동을 더욱 비 가시화한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가정폭력이 늘어난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밖에서 일로써 인정욕구를 채우지 못한 남성들이 집 안에서 여성 가족 구성원을 폭행한다는 것이다. 절반만 맞다. 가정폭력은 항상 존재했고, 코로나19를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전염병이 아니어도 폭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재택 요구는 집 밖이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만 많은 여성들에게 이미 집은 가장 위험한 공간 중 하나였다. 코로나19라는 보기 좋은 핑계를 붙여 사람들은 ‘노멀’했던 상황을 ‘뉴노멀’처럼 말하고 있다.     

재택근무 증가로 여성이 집에서 가사노동과 일을 동시에 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지적에 대한 대책은 여전히 여성의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가사노동, 돌봄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고통이라는 ‘노멀’을 재평가해 ‘뉴노멀’로 만들겠다는 의지는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마스크를 벗고 지인들과 길을 걸으며 이야기했던 ‘노멀’했던 때의 소중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노멀의 소중함을 알았다고 하지만 현재의 ‘뉴노멀’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인간적 관계가 중심이 되는 ‘노멀’의 가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비대면’에 대해 말한다.      


그림자

비대면은 사실 누군가(대개는 여성들)의 ‘그림자노동’ 덕에 가능하다. 화상회의를 위해 누군가가 시간을 할애하며 세팅을 했고, 그 노동에 의존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대면을 핵심으로 한 ‘뉴노멀’은 이 그림자 노동을 강요한다. 비대면 노동을 하기 위해 투자되는 시간을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가 개인의 능력이 된다. 스스로 이런 속도에 익숙해져가는 만큼 상대 역시 준비돼 있기를 기대한다.     


시도 때도 없이 참여가 강제되는 화상회의가 부당하다고 이야기하는 이들 조차도 자신이 인터넷으로 주문한 식품이 빨리 도착하지 않는다며 배송 추적 과정을 검색하고 콜센터에 전화를 건다. 사업주들은 배송기사들의 밤낮이 바뀐 노동과 속도전을 독려하면서 그 시간을 최소화하는 데 열을 올린다. 소비자는 신선한 물품이 새벽 배송되는 것에 감사하기보다 늦은 배송을 탓한다. 라이더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그저 악덕 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감각과 속도에 맞춰주길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이기도 하다. (pg33)     


자신의 속도와 타인의 속도가 다를 수 있다는 것, 즉 수신자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은 약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환되고 제공되는 정보는 소비의 대상일 땐 편의가 되지만, 원치 않는 정보들이라면 피로감을 준다.      


퇴근 후 21시가 돼서야 다음날까지 아이가 해 가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교사에게 문자를 보내야 하는 엄마, 변화한 상황과 정보를 안내하기 위해 학부모의 출근 시간 이전에 문자를 보내야 하는 교사가 있다. 누가 갑이고 을인지를 구획하는 대신, 시공간에 대한 상이한 감각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 모두가 지쳐가는 이 상황이 타당한지를 물어야 할 때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흐름이 오히려 개인이 위치한 장소를 비가시화하고 또한 공유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것이 그저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것 자체가 혁신이 될 수는 없는 이유다. (pg35, 37)     



아동의 발달 과정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0~5세 사이의 어린이는 자신에 대한 감각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시간도 자신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흐르고 있으며, 내가 장난감 놀이를 하고 있는 순간에 다른 이는 공놀이를 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시간에 관한 인지능력은 8세 이후가 돼야 발달된다고 한다. 현재의 ‘비대면’ 활성화는 이런 시간에 대한 인지발달을 모든 사람에게서 더뎌지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 외에도 책은 코로나19와 관련된 동선공개, 마스크, 신천지, 민주주의 등 총 10가지 주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던진다. 한 챕터가 그리 길지 않고 쉽게 읽혀 ‘십일야화’의 기분으로 보면 새로운 시각 열 가지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시공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지인A와는 어떻게 해야 될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워내는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