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처돌이의 고백
오늘은 호주 워홀 때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 나는 해외문학 편집 일을 하다가 서른하나에 ‘막차’를 타고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갔었다.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 때라 처음에는 그저 호주에서 7개월만 살아 보는 게 목표였다. (구직 과정 1개월+일 하는 시간 6개월, 하여 7개월이라는 구체적인 기간이 정해졌다) 그 정도면 지쳤던 마음도 많이 회복되고, 외국 생활에 대한 궁금증도 어느 정도 해소될 것 같았다. 하지만 살아 보니 나는 너무나 호주체질이었고, 어느덧 직장도 거처도 몇 번씩 옮겨서 거의 2년을 채워 가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이렇게 마음 편히 쉬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핑계로 최대한 방탕하게 살고 있었다. 당시 나의 일과는 이러했다. 오전 7시 기상. 대충 씻고 선크림만 바르고 일을 간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4시 반. 샤워하고 자기 전까지 유튜브를 본다. 가끔 친구들과 파티가 있는 날은 (사실 자주 있다) 함께 맛있는 걸 만들어 먹고, 자기 전까지 유튜브를 본다. 쉬는 날은 늦게 일어나서 자기 전까지 유튜브를 본다. 그렇다. 나는 유튜브 중독자였다.
현대인에게 유튜브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하고도 다채로운가! 유튜브는 내 손 안의 TV이자 오디오북, 주크박스이며, 요리책이고, 생활법률 변호사에 동기부여 연설가, 영어 강사, 브랜드 세일 소식통이며 홈트 트레이너였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새롭고 매력적인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나만의 충실한 반려앱이었다. 처음에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구독하다가 나는 이맘때 ‘케미TV’의 ‘사랑과 전쟁’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케미TV는 예전에 방영됐던 ‘사랑과 전쟁’ 에피소드를 15분 내외로 편집해 재밌는 자막을 달아서 업로드 하는 채널인데, ‘웬 사랑과 전쟁?’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정말 마약과도 같아서 하나씩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게다가 유튜브는 재생 속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1.25배속으로 보며 빠르게 내용만 파악할 수 있고, 그럼 왠지 내가 시간을 아끼고 있다는 허황된 생각까지 하게 된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비혼을 결심했습니다”와 “결혼도 안 했는데 이혼만 수십 번 한 것 같다”는 댓글에 폭풍 좋아요를 누르는 ‘사랑과 전쟁 고인물’이 되었다.
유튜브는 수만 가지 장점과 한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유일한 단점이란 ‘보고 나면 허무하다’는 것이다. 매일 유튜브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고 딸려 오는 허무함의 쓴 물에 속이 부대끼길 반복하던 어느 날, ‘진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까지 몇 달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생물학적 나이는 32.8세쯤 되는 어느 쨍한 날이었다. 나는 유튜브 어플을 지웠다.
당장 생산적인 일이나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일단은 습관을 바꾸는 게 더 중요했기에 나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저녁을 먹는 애매하고 지루한 시간마다 습관적으로 영상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대신 브런치를 켰다.
처음엔 추천 글들 위주로 읽다가 점차 내가 관심 있는 분야로 좁혀갔다. 브런치 작가들 중에는 직장인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실무 이야기나 업무 관련 고민들을 엿볼 수 있었고, 자연스레 그들의 상황에 나를 대입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가상 직업 탐구’다.
출판편집자들의 글을 읽으며 그들처럼 치열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홍보인과 마케터의 글을 읽으면서는 그 두 분야가 어떻게 다른지 조금이나마 감을 잡았고, 현직 MD의 연재를 통해서는 MD가 ‘뭐든지 다’라는 것의 약자라는 것도 알았다.(물론 우스갯소리다) 그분들의 시간과 일상과 고민이 담긴 소중한 활자를 통해 나는 자영업자가 되었다가,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었다가, 스타트업의 CEO가 되었다. 이상하게 내가 겪지 않은 일인데도 공감이 갔고, 직업인으로서 사람들이 일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는지를 깨닫고 감동했다. 이 글을 통해 밝히자면 나는 그렇게 진지하게, 자기 주도적으로 일하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분들의 글을 통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떤 분야가 맞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고, 사회인으로서의 마음가짐 또한 많이 배웠다.
나는 무언가 만들어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에 큰 매력을 느낀다. 다양한 콘텐츠를 체험하고 소비하는 걸 좋아하고, 나 역시 유용하고 재밌는 콘텐츠를 기획/제작해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 그래서 몇 명 보지는 않지만 꾸준히 네이버 블로그를 연재해 왔고, 유튜브 영상도 업로드 했었다. 다행히 요즘에는 콘텐츠 시장이 커져서 전보다 질 좋고 다양한 콘텐츠들이 많아졌고 기획자와 제작자에 대한 대우도 좋아진 것 같다. 콘텐츠를 기반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홍보하는 일이 하고 싶어졌다. 이런 분야에 종사하는 브런치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한 문제 한 문제 깊이 공감하고 고민했다. 나는 아직 워홀러지만 마음속에는 벌써 콘텐츠를 회사를 몇 개 차린 것 같았다. 앞으로 내가 뭘 더 배우고 정진해야 하는지도 감이 잡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은혜를 갚기 위해, 나 역시 해외문학 편집자로서 일과 프로세스에 대해 몇 자 적기로 했다. (아직 열심히 작업 중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며 방탕하게 유튜브만 본 건, 사실은 두려워서였던 것 같다.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랐고, 전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봐 걱정됐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한국에서 긴 공백을 가진 내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당장 귀국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잉여로울 시간들이 걱정됐다. 하지만 하고 싶은 걸 정하자 앞으로 해야 할 것도 명확해 졌고, 막연하기 때문에 부유하던 두려움도 많이 잠잠해 졌다. 사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꿈을 오래 그려온 사람은 그 꿈을 닮아 간다고 한다.
정말일까?
믿고 싶어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