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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Dec 23. 2018

길 위에서 만난 사람

제주에서 만난 인연




나는 낯을 굉장히 많이 가리는 편임에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돌이켜보면 모임 비슷한 것을 꽤 많이 해 본 편이다. 4년 전 시작한 독서 모임은 지금도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모임이며, 껄끄러운 부분이 생겨 거리를 두고 있지만 한때 노래 모임도 꽤 오래 지속했다. 대학교에 다닐 땐 소설 창작 (과)동아리와 통기타 (과)동아리도 해 봤고, 비록 한 학기에 그쳤지만 학교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어쿠스틱 소모임을 만든 적도 있다.


물론 모임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는 걸 아주 좋아한다. 단 한 가지의 접점도 없는 타인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는 기회니까.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인생관을 듣는 것도, 꽤나 굴곡이 많았던 누군가의 삶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 게다가 여행이라는 낭만이 더해지면 보통은 별거 아닌 기억도 기분 좋게 남기 마련이다.



스무 살에 처음 떠난 나홀로 제주 여행에서는 중학교에서 지리 과목을 가르친다는 선생님을 만났다. 그녀는 술에 취해 주상절리에 관한 강의를 다섯 번 정도 반복하다가, 함께 여행을 온 친구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남자친구와 여행을 왔다는 경상도 언니는 혼자 온 나를 '막냉이'라 부르며 맛있는 걸 먹여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대만에서는 하루 묵었던 호스텔의 하우스 키퍼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수줍어하면서도 더듬더듬 말해 준 "Your smile is beautiful."이라는 한 마디가 기분 좋았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브라질 아저씨는 나와 내 친구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해 놓고 몰래 숨어 빵을 먹다가 들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모두 즐겁고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내 추억을 더 아름답게 꾸며 준 인연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면 단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약 2년 전인 2016년 10월의 제주.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수업이 없는 날을 골라 '마음의 고향'이라 부를 정도로 사랑해 마지않는 제주를 향해 떠났다.

수업이 끝나고 비행기를 탔더니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계획도 뭣도 없이 떠나온 여행. 나는 대충 짐을 풀고는 다음 날 계획을 세우기 위해 게하 거실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거실 탁자에 자리를 잡고는 책꽂이에 잔뜩 박혀 있는 근처 가이드맵을 하나 꺼내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같이 게임 하실래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금세 "위에 있어요."라는 말이 들렸다. 그 말에 천장을 올려다보니 사다리가 연결된 다락방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저희 게임하고 있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해요."


그의 제안에 가이드맵을 정리하고 다락방에 올라가자 보드게임을 펼쳐 둔 두 명의 여행자가 있었다. 40대의 A 삼촌과 30대의 B. 그들은 각각 혼자서 여행을 왔다가 심심해서 함께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세 명부터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이 하고 싶어졌고, 나머지 빈자리를 채울 한 명을 물색하던 중 마침 거실에서 가이드맵을 보고 있던 내가 눈에 띄어 포섭해온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숙소 점등 시간이 될 때까지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며 함께 게임을 했다. 통성명과 서로의 이야기 끝에 아주 조금 친해진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성산일출봉에서 함께 일출을 보기로 약속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우리는 함께 해도 뜨지 않은 일출봉에 올라 구름만 잔뜩 낀 하늘을 보고 내려왔다. 이후 맛있다고 소문이 난 근처 갈치조림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일출봉 근처로 돌아와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나나, 별 다를 바 없는 B는 A 삼촌의 권유에 따라 함께 비자림에 들러 용눈이오름까지 올랐다.

A 삼촌은 짧은 여행을 함께 한 기념으로 B와 나에게 폴라로이드 사진을 한 장씩 뽑아 주었다. 둘만 남은 B와 나는 어쩌다 보니 이틀의 여행을 함께하게 되었다.


셋이 나란히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던 순간


나는 뚜벅이 여행자였기 때문에 B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며 그와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당시 서른한 살이었던 그는 원래 터키에서 잠시 통역 일을 했었다고 한다. 터키어를 좋아해서 열심히 배웠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수요가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현재는 그쪽과 거리가 먼 평범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하지만 얼마 전부터 다시 터키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던가.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린 날, 그는 다시 터키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직후 잘 다니던 회사를 무작정 때려치우고 터키의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앞으로 최소 6년 동안 터키에서 석사 과정, 박사 과정까지 마칠 생각으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제주 여행은, 일주일 남은 출국 전에 마지막으로 떠나온 여행이었던 것.

함께 여행할 때에는 그냥 성격 좋고 재밌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와, 진짜 멋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포함한 모든 외국어에 쥐약인 나는 터키어를 공부한다는 점에서부터 그가 참 대단해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서른한 살에 꿈을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했다는 점이 더더욱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제주 여행이 끝나고 정확히 일주일 후, 그는 터키로 출국했다.

여행 마지막 날 그와 서로의 SNS 주소를 공유한 덕에 지금도 종종 근황을 알게 되곤 한다. 이제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그는 여전히 터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며 한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꿈을 위해 안정을 포기한다는 것. 그야 말이 쉽지, 솔직히 나였다면 한참을 고민만 하다가 시기를 놓쳐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테다. 노래를 하고 싶어서 팀을 구했다가 몇 번 좌절한 시기에도 그랬고, 두어 번 소설 공모전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후로도 그랬다.


'나는 안될라나 보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심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던 건 아닌가 싶다. '안될라나 보다'라는 생각 때문에 일찍이 포기해버린 것이, 짧은 삶 동안 얼마나 많았던가. 


제주에서 만난 그도 이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인연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씩은 그가 가진 용기와 열정을 떠올리곤 한다. 단 며칠의 여행에서 이토록 오래 남는 추억을 얻게 된다면 참으로 '남는 장사' 아닌가. 게다가 배울 점까지 있었으니.



나는 사람이 좋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은 이는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고, 또 내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즐겁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항상 내게 좋은 자극이 되어 주었다.

어쩌면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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