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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Nov 18. 2018

네게 주었던 빨간 양장 노트

첫사랑의 기억에 관하여

한창 어린 날 했던 첫 연애. 나는 매일매일 일기처럼 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매일 무언가를 한다는 건 마음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밥을 먹는 것처럼, 잠에 드는 것처럼 몸이 알아서 신호를 보내주는 일도 아닐뿐더러 나는 애초에 해야 할 일을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단 하루도 밀린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은 오늘 있었던 일, 어느 날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은지에 대한 절절한 고백, 어느 날은 고민거리가 많은 너를 걱정하는 말로 얇디얇은 종이를 빼곡히 채워나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게으름의 현신인 내가 어떻게 하루도 잊지 않고 편지를 썼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반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얇은 양장 노트를 꼭 채울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네가 하루마다 편지를 한 장씩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트를 선물했다. 

당시 군인이었던 너에게 어떤 방법으로 전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포를 부쳤던가, 휴가를 나온 네게 직접 건넸던가. 어느 쪽이든 약간의 수줍음과 뿌듯함, 한 장의 편지마다 겹겹이 쌓인 애정이 노트 곳곳에 묻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느 때의 첫사랑이, 첫 연애가 그렇듯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너의 얼굴마저 흐릿해졌지만 그 빨간 양장 노트만큼은 왜인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노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문구점에서 고르고 골라 겨우 찾아낸 빨간색의 양장 노트.

무엇도 재지 않았던, 오로지 순수한 20대 초반의 사랑이 담겨있던 종이들.

너의 방 한 구석에 이불처럼 먼지를 덮고 조용히 잠들어 있을까? 아니면 내가 너와 헤어진 날 그랬듯 박스에 다른 추억들과 함께 차곡차곡 담겨진 채로 분리수거함에 들어갔을까.

그리고 그때 내가 했던 무엇도 바라지 않는 사랑을, 언젠가는 다시 할 수 있을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와 했던 연애가 그리운 건 아니다. 나는 그때 받았던 애정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에.

하지만 가끔 그때 생각이 나는 건, 언젠가 찾아올 헤어짐이라든가 내가 주는 만큼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오로지 나의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아무리 내 딴의 순수한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너와 했던 연애에서만큼 때 묻지 않은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내가 참으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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