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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머리영 Jul 14. 2021

설마와 설마설마

올해는 꽃밭이어라

작년에 설마와 설마설마가 사람 잡은 일이 있다. 결혼기념일을 혼자서만 기억하고는 밖으로 말도 꺼내보지 못한 어떤 여자 이야기다. 여자는 혼자서라도 기분전환 겸 선물을 사러 나갔다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진정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 쓰레기 같았다가도, 금세 살아있음에 감탄할 수 있었던 힘! 그것은 꽃다발이나 립스틱 같은 선물이 주지 않았다. SNS에서 생명다양성의 날을 알리는 환경단체의 피드가 눈에 들어왔고, 멸종위기종의 위태로운 삶을 보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자축 선물을 사려던 돈으로 단체를 후원했다. 쓰레기 같은 자신도 사는데, 같이 살아보자고 생각했다. 죽지 못해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루하루를 누리며 너도 살고 나도 살아 보자고.


생명도 다양하고, 성격도 다양하리라는 말장난 같은 깨달음에 웃음까지 났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지만, 성격다양성을 생명다양성만큼이나 중시하며 타인을 인정하며 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를. 


설마가 사람 잡는다 [죽인다]

그럴리야 없을 것이라 마음을 놓거나 요행을 바라는 데에서 탈이 난다는 뜻으로, 요행을 바라지 말고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미리 예방해 놓아야 한다는 뜻




열 다섯 해 전에 오월의 신부로 입장했던 여자는 작년처럼 요행을 바라지 말고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방해 놓고자 했다.


스마트폰을 바꾸면서 어떤 이벤트에 자동으로 접수되었는지, 꽃다발이 당첨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마침 결혼기념일을 앞두고였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하늘에 감사했다.


택배가 왔는데, 같은 상자가 2개다. 차례로 열어보니 하나는 하늘이 보내신 것이 맞고, 다른 하나는 이벤트의 내용을 알고 응모하여 당첨된 신랑이 보낸 것이었다. 이 역시 하늘이 보내신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내용 없는 빈 카드가 들어있는 내 꽃다발과는 달리 결혼 기념 15주년을 감사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카드가 꽂혀있었다. 게다가 장문의 카톡을 받았다.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사과였다. 막내를 가졌을 때에 낳지 말자는 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도록 사과를 받지 못했다. 때때로 그 말이 되살아나 서운할 때마다 '내편'이 아닌 '남편'임을 인정하고자 했다.


그 말이 너무 서운했고, 사과받고 싶다고 몇 번은 말하기도 했다. 흘리듯이 말하기도 하고, 대놓고 퍼붓듯이 말하기도 했다. 벽에 대고 말했던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렇게라도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가 되어야 하는데. 나도 참 욕심이다. 이만하면 잘 살고 있는 것이겠지.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성격다양을 인정하며 살자면서도 말만 멋지게 하고 산다.


어쨌든 꽃밭이었던 올해의 결혼기념일을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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