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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머리영 Jun 17. 2020

위기의 주부, 일복 많은 남자랑 삽니다.

결혼기념일에 일어난 일

주말부부  

   

결혼 14년 차. 헤아려보니 딱 절반은 주말부부로 지냈네요. 남편이 이직을 하게 되어 지금은 주말부부입니다. 본사가 여기 있지만 경기도로 파견근무를 나가 있어요. 장기 파견근무요. 저는 일을 하다가 큰 아이를 낳기 직전에 그만두고 지금은 삼 남매를 혼자 키우고 있습니다. 그나마 친정이 근처라서 반찬을 조달받으며 지내는 것이 크나큰 다행이고요.     


누가 그러시던데,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는 게 주말부부라고요. 에이, 그런 소리 마세요. 사랑하는 가족과 매일 얼굴을 보고 직접 목소리를 듣고 부대끼며 살아야지요. 지지고 볶더라도 서로 봐주기도 하고 넘어가 주면서요. 너무나 사소해서 당연한 모든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야지요. 평일에도요. 매일매일요.    


진정으로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요. 그래서 거꾸로 얘기해보고 있습니다. 반대로 살았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고요. 읽어주시는 분들을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 허락되지 않은 상황을 꿈꾸며 결국 거짓말을 해보고야 말았다고 자수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결혼생활 절반은 주말부부로 지낸 것은 맞는데, 시기가 정반대예요. 신혼 초부터 7년간은 광주에서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남편이 군산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고, 결국 망설여오던 이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어디로 갈까를 두고 고민하곤 했는데, 지금은 시댁과 가까운 군산에서 살고 있네요.     


신혼 때에는 주말부부를 부러워하시는 교회 집사님들 말씀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어요. 다 저를 위로하려고 그러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인생을 몰라도 한참을 몰랐던 거죠. 그분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진심을 담아서 말씀하셨는지를요. 이제라도 가슴 깊이 깨달았노라고 꼭 전해드리고 싶네요. 어쩌면 이렇게도 인생의 타이밍은 저를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정반대로 흘러가는 걸까요?    


결혼기념일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부정적인 추측을 강조할 때 쓴다.

(유의어) 설마한들, 설마 하니, 아무리    

설마설마

‘설마설마하다(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계속 부정하다)’의 어근.    

설마가 사람 잡는다 [죽인다]

그럴 리야 없을 것이라 마음을 놓거나 요행을 바라는 데에서 탈이 난다는 뜻으로, 요행을 바라지 말고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미리 예방해 놓아야 한다는 말.     




불행한 예감에 국어사전을 검색해봤어요. 아무 단어나 네이버에 넣어보는 거죠. 사실 기억하고 있다 해도 특별할 건 없어요. 저희는 선물 같은 건 안 해요. 그래서 선물 기대는 하지 않아요. 그냥 아이들과 그 핑계로 외식이나 한 끼 하고 오겠지요. 이벤트가 있다면 초코 케익에 14주년이니까 초 14개? 아니면 5명이니까 초 5개? 그냥 삼 남매니까 초 3개? 별 거 없는 날이지만 그래도 기억은 해야 하잖아요. 서로가.      


요행을 바라지 말고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미리 예방해 놓아야 하는데, 안타깝게 저도 설마 했어요. 설마설마했다고요. 딸랑 날짜만 기억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 사람 잡은 거고요. 보통은 퇴근 시간이 늦어서 자정 넘어서야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일찍 와서 저녁을 같이 먹었어요. 밥상을 치우도록 말이 없기에 그냥 저도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마냥 우울해 있었는데, 단톡 방이 울렸어요. 선생님 한 분이 강연회 있는 날로 착각하고 서점에 나오셨다면서 이제 무얼 해야 하나 너무 슬프다고요.    


‘위로드립니다. 아래로는 안 드릴 겁니다.’    


설마와 설마설마가 나를 잡은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어요. 이러한 말장난을 제가 몹시 좋아하여 아이들에게 자주 하기도 하거니와, 이 분 이게 처음이 아니시거든요. <위로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해주셨던 강사님이시기도 한데 그때에도 ‘위로의 언어는 아래로의 언어가 아닙니다’와 같은 기초적인 언어유희로 저를 사로잡으신 전적이 있는 분이셔요.     


카톡창 글자에 그분의 목소리가 오버랩되면서 신비한 기운이 아래로가 아닌 위로부터 내려와 저를 감쌌습니다. ‘괜찮아. 이제라도 기념하자. 아직 오늘이 남아있잖아. 나를 위한 무언가를 선물하자.’ 선물이라는 단어에 한결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예방하지 않고 요행이나 바라서 탈이 나버린 저 자신을 오히려 탓했어요. 각자 잘 준비를 하는 아이들에게 쓰레기 좀 버리고 오겠다고 하고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남편은 먼저 잠이 든 것 같았고요.    


‘꽃집에 갈까? 그래 장미를 한 다발 사다가 식탁에 꽂아두자.’

‘아니야. 곧 시들어버리고 말 텐데, 돈 아까워. 립스틱을 하나 살까?’

‘그래 지금 쓰는 것도 친구가 사준 건데, 색이 좀 세서 부담스러웠어.’

‘아니야. 마스크 써야 하는데, 이 시국에 립스틱은 좀 아닌 듯.’

‘그럼 뭘 사지?’    

  

셀프로 스스로를 축하해보겠다며 발걸음도 가볍게 나섰지만, 물욕을 자제하고 내려놓은 지가 오래되어 ‘나’를 위한 선물 하나 고르기가 쉽지 않았어요.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고, 쇼핑도 해 본 사람이 잘 사는 건가 봐요.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건너편에 일곱 살 막내 키만큼 훌쩍 자란 구절초들이 가득 피어있는 거예요. 공원이나 쭉 뻗은 가로수 길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 가지런히 정돈되지 않았지만 바로 그런 관리받지 않은 야생성이 저를 더욱 자극하더라고요. 동네 마트 화단이 이러기 있는 거냐며 사진도 찍고, 양팔 벌려 한 아름 안아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위로부터 따스한 기운이 저를 감싸더라고요.     


‘괜찮다. 이제 정말 괜찮네. 내가 필요한 물건을 언제든지 살 수가 있는데 오늘 꼭 무엇을 장만해야만 하는 건 제대로 된 기념이 아니지. 이것으로도 감사하다. 기념일이면 뭐?’    


그렇게 미소 지으며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습니다. 방금 찍은 꽃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볼 생각으로 벤치에 잠깐 앉았어요. 피드를 훑어보다가 팔로우를 하고 있는 환경단체에서 며칠 후 생명다양성의 날이라고 그 날을 미리 소개하는 카드 뉴스를 올리셨더라고요.     


생명다양성이란 말 그대로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들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말인데요. 코로나와 같은 지금의 팬데믹은 생명다양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해요. 평생 침팬지 연구를 하신 제인 구달 박사는 ‘동물을 존중하지 않고 지금처럼 야생의 훼손이 지속되면 팬데믹은 또 찾아온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이러스가 종의 장벽을 넘는 바람에 이러한 질병이 일어났다’라고요.      


제가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책 표지 챌린지를 2차까지 참여해봤는데요. 그 날짜에 맞게 책을 골라 읽고 표지를 찍어 올리는 일이 굉장히 유익하고 재미있었어요. 세상에 여러분, 제가 집콕 기간에 적성을 찾아버렸습니다. 북큐레이션! 일주일간 참여하고 끝나버린, 이제는 누가 시켜주지 않는 챌린지지만 저는 계속해서 어떤 날을 기념하며 관련 도서를 수집해서 아이들과 읽고 표지 사진을 피드에 올려가며 공유하고 있답니다.     

  

자연스럽게 ‘생명다양성의 날이라니 무슨 책이 있을까?’하고 책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번 결혼기념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 요행을 바라지 말고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미리 예방해 여러 기념일들을 준비하고 기념하고 싶어 졌습니다. 설마와 설마설마가 사람 잡는 일이 없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이라이트는 내년 결혼기념일이 되려나요?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일, 이왕이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기분 좋은 선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쇼핑하랄 때는 머리가 텅 비어버리더니 신기하기도 하지요. sns를 통해 만나는 몇 개의 환경단체 소식에 좋아요를 눌러드리고는 있지만, 오늘만큼은 꽃값이나 립스틱 값 정도의 후원을 해보기로 한 것이에요.     


장미 꽃다발이나 신상 립스틱보다 저를 더 살아있게 만들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 지금부터 위기의 주부가 들려드리는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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