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는 자기 우산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전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학교까지 달려갈 때가 많았고 오후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갔다. 디디는 비가 좋았고 우산 때문에 비가 싫었다. 우산은 괜히 비싼 물건이었다. 디디의 집에서는 살대가 휘고 천이 말려올라간 우산 몇 개를 네 식구가 공용했고 대개 모자라서 남는 일은 드물었다. 자기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낡은 우산으로 잃어버린 우산을 갚음할 수는 없었다. 디디는 도도에게 우산을 잃어버렸다고도 새것을 사주겠다고도 말하지 못한 채로 국민학교 졸업반을 다녔다. 도도는 우산을 재촉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엔 다른 우산을 가지고 다녔다. 빌려준 우산에 관한 것은 잊은 듯 무심했으나 디디는 도도와 도도의 우산을 신경썼다. 우산 하나를 빚졌다는 생각에 비 오는 날엔 마음이 무거웠다. 도도의 목소리를 듣거나 도도가 근처에 있으면 고리 모양의 우산 손잡이가 목에 걸린 것처럼 그쪽 방향으로 몸이 무거워졌다. 도도와는 본래 자주 말을 나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날 이후 더욱 말을 나누는 일 없는 사이가 되어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파씨의 입문, 디디의 우산』
커피 한잔을 내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폈다.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
밤사이 빗물에 목욕 한 나뭇잎들이 빛을 받아 더없이 반짝였다. 번쩍번쩍 우르르 쾅 하고 천둥번개까지 치며 비가 쏟아지던 어젯밤의 일이 아득한 옛날같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노화로 아픈 무릎을 괜히 비 탓하며, 비가 오시려나 하며 일기를 예측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많이 써서 아픈 거지 왜 비 탓을 할까 했었다. 비가 오면 기압이 내려가니 신체 부위 중에서 특히 약한 곳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가 들고 몸과 마음의 어느 부분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후에야, 그 말이 와 닿았다. 나도 비가 오면 기분이 울적하고 자주 슬픈 생각들이 들곤 한다. 아마도 나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약한 것 같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바짓단이 빗물에 젖는 것도 신발이 축축해지는 것도 싫다. 많이 걸으면 종아리에 흙탕물이 튀는 것도 싫고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도 싫다. 그중에서 가장 싫은 것은, 비가 오면 생각나는 기억들이다. 예고 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들은 우산을 받쳐 들고 학교 정문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하굣길에 아이들은 제각각 엄마 손을 잡고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비를 맞으며 버스정류장까지 혼자 걸어가야 했다. 우리 집은 학교와 멀었고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밖에 없었다. 더구나 가게를 하는 엄마는 비가 온다고 해서 내게 우산을 가져다줄 수도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이런 생각들이 가끔 나를 놓아주지 않아 다 커버린 지금도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또 하나, 비 오는 날 변변하게 들고 갈 우산이 없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도 싫다. 지금 나에게는 나만의 우산이 있다. 버튼을 한번 누르면 자동으로 착하고 펴짐은 물론, 다시 버튼을 한번 누르면 착하고 접히는 우산이다. 우산은 삼단으로 접혀 가방에도 쏙 들어간다. 어느 행사장에서 기념으로 받은 우산도 아니고, 어딘가에서 다른 사람의 것과 섞여 있다가 하나 남은 우산을 어쩔 수 없이 가져와야 했던 그런 우산도 아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려고 허둥지둥 산, 지하철역 앞의 가판대에서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우산이 아니다. 여러 개의 우산을 펴보고 색깔이나 감촉을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사 온 우산이다. 그러기에 나에게 우산은 소중하다. 집에 돌아오면 물을 꼼꼼히 털어내고, 남아있는 물기를 말리려고 우산을 현관에 펴놓는다. 뽀송하게 말린 후, 착하고 눌러 주름진 결대로 잘 접어둔다. 다음에 비가 오는 날 함께 해야 하니까. 비 오는 날, 살대가 휘거나 천이 말려 올라가는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마치 나 자신이 하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그 창피했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나는 우산만큼은 꼭 백화점에서 산다. 어쩌면 우산이라는 물건은 씁쓸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지닌 특별한 사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날이 조금이라도 흐리거나 비소식이 있으면, 나는 외출 전에 꼭 나만의 우산을 챙겨나간다. 물론 펼쳤을 때 둘, 셋이 나눠 쓸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 비도 덜 맞고 좋기는 하다. 그러나 비가 그치고 나면 들고 다녀야하는 거추장스러움이 싫다. 그렇게 들고 다니다가 어딘가에 우산을 놓고 오는 것도 싫다.
소설 속에서, 디디와 도도는 비가 오는 하굣길에 나란히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간다. 디디의 집이 더 멀어 도도는 디디에게 자신의 우산을 쓰고 가라고 한다. 디디는 도도에게 빌린 우산을 다음날 바로 돌려주려고 곱게 말려두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도도의 우산을 오라비가 가져가 버렸다. 디디의 오라비는 어디선가 우산을 잃어버리고 온다. 디디는 이불 속에서 오라비 따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끝내 우산을 돌려주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디디는 도도를 똑바로 바라볼 수도 말을 걸 수도 없다.
결핍이라는, 부재라는 거창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아픔이 들어있는 ‘우산’이라는 사물. 겨우 우산 하나 돌려주지 못한 것 때문에 오라비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불 속에서 울고 있는 디디. ‘디디의 우산’은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