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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Jan 02. 2023

아버지의 자전거

               

  “선우 자전거 사줘라.”  

  아버지가 두툼한 봉투를 방바닥에 내려놓으셨다. 다섯 번째 항암치료를 받으러 서울에 오셨을 때였다. 봉투에는 만 원짜리 백 장이 들어있었다. 은행 계좌로 보내면 편할 텐데. 아버지는 굳이 은행에 가서 직접 돈을 찾아오신 것이다. 돈 봉투를 받으면 기뻐야 하는데, 왠지 슬펐다.


            

  버스가 드물게 다니던 그 시절, 내 아버지에게 자전거는 간절하고도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입덧을 심하게 했다. 임산부가 물도 못 마시고 누워있으니, 아버지는 엄마가 무척 안쓰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결혼하고 8년 만에 한 임신이니, 얼마나 애가 닳았을까.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임산부여서 태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불안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다 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고, 엄마는 자장면이라고 했다. ‘고기나 과일이라면 비싸더라도 사 오기가 수월했을 텐데, 바보같이…….’ 엄마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조 섞인 말로 그날의 아쉬움을 표현했다. 아버지가 자전거로 왕복 10킬로를 달려서 사 온 보람도 없이 자장면은 역시나 불어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렇게 먹고 싶었던 자장면이었는데도, 막상 먹으려니 속이 울렁거려 한 젓가락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미안한 것도 미안한 것이지만, 자장면이 너무 아까워 그게 더 속상했다고 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버지의 자전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 위를 달리는 풍경이 그려지곤 했다. 엄마가 먹고 싶어 하는 자장면은 태아의 간절함이란 것을 아버지가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쉼 없이 굴러가는 바퀴, 삐걱대며 돌아가는 체인, 덜컹덜컹 길바닥의 작은 돌멩이에도 튀어 오르는 안장, 오르막길에서는 더 힘껏 눌리는 페달, 내리막길에는 부드럽고 세심하게 잡히는 브레이크. 아버지가 구슬 같은 땀을 흘리고 있을 것만 같다. 자장면을 사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배로 힘이 들지만 멈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장면이 불어 터지기 전에 도착해야 했으니까.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열심히 페달을 굴리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8년을 기다린 아이, 이제 곧 아버지가 된다는 설렘과 기대, 그렇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그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일 년 후, 아버지는 자전거에 자장면 대신 나를 태우고 동네를 달렸다고 한다. 들에도 가고 논에도 갔다. 이제 자신에게도 자식이 있다는 것을 온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아버지의 자전거에 타고 있던 순간은 사진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우리 부녀가 최초로 찍은 사진이 아닐까 싶다.



  2021년의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5월 5일,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나는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었다. 3일 뒤에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들이 자전거에 올라앉아 페달을 밟았다. 바퀴가 구르며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갔다.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어디를 달려가고 싶을까? 자전거를 타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갔으면 좋겠다. 자전거를 타다가 다리가 아프면 잠시 쉬며 주변의 경치도 즐기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목적지가 있는 자전거 타기를 해도 좋고, 타다가 목적지가 생겨도 괜찮을 것이다. 나의 아들이 그런 마음으로 자전거 타기를, 아버지도 바라고 계실 것이다.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는 뒷모습을 보니, 40여 년 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기쁘면서도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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