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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Dec 28. 2022

인생의 회전목마

친구를 만나러 가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제곡인 ‘인생의 회전목마’였다.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자연스럽게 이 곡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다양한 리듬과 아름다운 선율이 어우러지면서도 자유스러운 느낌을 주는 왈츠곡이다. 내 앞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가방 속을 뒤적이는 동안 벨 소리가 한참 울렸다. 남자는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전화기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거리의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로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있는 듯 보였다. 하늘은 흐렸고,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그와 헤어진 날도 흐리고 추운 겨울이었었다. 우리는 그의 집 근처 골목 어귀에서 한참을 쪼그려 앉아있었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그는, 그날따라 더 긴 침묵으로 나를 불안하게 했다. 말없이 담배만 피워대는 그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나는 알고 있었다. 침묵은 예정된 이별의 시간을 늦출 뿐이었다. 어떤 희망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제 그만하자.”



침묵을 깬 것은 그였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만나자고 하는 줄 알면서도, 나는 굳이 말로 표현된 그의 마음을 듣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희망의 조각이라도 찾아 헤매다가 끝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댈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더 이상 이별을 미룰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났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그의 마지막 호의를 거절하고 혼자 돌아왔다. 수백 번도 더 오가던 길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과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무사히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내 방은 그의 마음처럼 싸늘히 식어있었다. 추운 방에서 웅크리고 밤새 울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우리가 처음 같이 봤던 영화다. 그 즈음 시험 기간이라 학원 일에 피곤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거의 영화가 끝날쯤에서야 정신이 들었고 그에게 부끄러웠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울려 퍼지던 주제곡인 ‘인생의 회전목마’의 멜로디는 미안함과 함께 한동안 내 머릿속에 머물러 있었다.



버스 안에서 들었던 멜로디는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멜로디와 함께 ‘그’와 함께한 추억도 나를 따라다녔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스키장에서 내 보드를 들어주던 그, 새벽 노량진시장, 자동차 극장에서의 추억들이 따라다녀서 마음이 심란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말수가 적었지만, 나와 둘만 있을 때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부모님 이야기, 형과 여동생 이야기, 그리고 그의 마음속을 오간 상념들…… 그가 하는 행동과 말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고, 내가 더 많이 좋아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열등감과 어두운 모습, 괴로운 마음들을 숨겼다.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언제나 마음을 졸이고 긴장하며 그를 만났다.



그와 헤어지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았다. 영화의 내용이 궁금했다.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그에 대한 미련과 내게는 미완으로 남겨진 영화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소피와 하울의 만남. 소피와 하울의 관계. 소피의 평범함과 하울의 특별함. 할머니가 되어버린 소피.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떤 의도로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의 모든 순간은 ‘그’와 ‘나’를 의미했다. 영화가 끝나고 ‘인생의 회전목마’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날, 내가 졸지 않고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떤 영화로 남았을까? 아마 그랬더라도 ‘그’와 처음으로 본 영화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모든 순간에 ‘그’가 나타나지도 않았을뿐더러 우연히 들은 멜로디로 온종일 마음이 심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특별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에게는 어떤 영화로 기억되고 있을지 가끔 궁금해지곤 한다. 오늘처럼 흐리고 눈이 올 것 같은 날에는 더욱더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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