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양 Dec 28. 2022

달링하버


대학 때 2주 동안 호주에 갔다 온 적이 있다. 일주일은 콘퍼런스에 참가하고, 일주일은 관광했다. 처음 가본 외국은 신선함과 충격 그 자체였다. 외국인과의 만남과 콘퍼런스에서의 경험이 내 안에 숨어 있던 ‘외국에서 살아보기’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시드니의 높고 푸른 하늘과 강렬한 햇빛, 그곳의 모든 풍광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꿈을 꾸고 있는가 싶을 생각이 들 정도로 아득하고 황홀했다. 먹는 것, 자는 곳, 돌아다니는 곳, 만나는 사람들. 모든 것이 날 들뜨게 했다. 반드시 다시 오겠노라, 고 다짐했다.



2003년 7월, 두 번째로 호주에 갔다.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유학 계획서까지 써서 보여드리자 마지못한 듯 허락하셨다. 하지만 동생이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기 때문에 나에게 금전적인 지원은 해줄 수가 없다고 했다. 야속하게 들렸지만 일단 허락을 받은 것이 기뻤다. 허락을 얻자마자, 나는 일을 그만두고 모아두었던 돈을 가지고 호주로 갔다.



영어에 자신은 있었지만, 언어의 장벽은 높았다. 오전에 어학원이 끝나면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도서관으로 갔다. 밤에는 알아듣기 힘든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잤다. 되도록 한국 사람들은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2, 3개월이 지나면서 차츰 호주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집 주변의 지리도 익혔고, 친해진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러 다니기도 했다. 나의 목표는 오로지 ‘유창한 영어 회화 실력’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었는데, 기본적인 문법과 어휘력을 갖고 있어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회화 실력이 늘었던 것 같다.



외국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혼자 있으니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선택해야 했다. 어떤 날은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버려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우울감이 찾아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집 근처에 있는 달링하버를 자주 찾았다. 요즘 사람들이 ‘불멍’ 하듯 나는 그곳 데크에 앉아 ‘물멍’을 했다. 멍하니 물을 바라보거나 가끔은 떠다니는 배를 바라보면서 한참을 앉아 있곤 했다. 저 배는 어디로 갈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한국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할까? 좀 더 영어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때로는 그렇게 ‘물멍’을 하다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기도 했다. 어떤 날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는 ‘영어 선생님’이었다. 딱히 달링하버가 아니어도 영어로 의사소통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달링하버는 나에게 휴식과 영어학습기회를 둘 다 주는 장소였다. 딱히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도 자주 찾아가는 가장 큰 이유였다. 가지고 간 돈의 대부분을 어학원비와 방세로 냈고 남은 돈은 아껴 생활했다. 그래서 주로 먹는 데 드는 비용을 아꼈다. 가끔은 사람들과 어울려 맥주도 한 잔 하고 주말에는 바닷가에 놀러 가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돈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달링하버는 나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달링하버로 들어가는 길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스타벅스라는 곳에 가봤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부러웠다. 하루는 나도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아마 마음이 울적했던 것 같다. 무작정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메뉴를 보니 커피값이 무척 비쌌다. 이 돈이면 한 끼를 때울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자 주문이 망설여졌다. 그래도 이왕 들어왔으니 큰맘 먹고 커피를 한잔 샀다. 커피를 들고 달링하버로 가서 데크에 앉았다. 쓴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내 인생도 이 커피처럼 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커피와 시원한 바람, 그리고 항구. 나는 그곳에 앉아서 외로움, 막막함, 포기하고 싶은 마음, 억울함, 부당함, 절망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커피와 함께 삼키거나 바람에 날려버리고 물에 흘려버렸다. 그때 커피는 써서 다 마시지도 못했다. 돈이 아까워서 한참을 들고만 있다가 식어버린 커피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쓴 것들을 다 버려서 그랬을까?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다. 스물여섯의 나에게 아낌없이 자리를 내어 준 달링하버가 있어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위로의 장소가 되어주고 있을 달링하버를 추억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同生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