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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떠나기 그리고 기다리기 - 19/12/13

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떠나기 그리고 기다리기>


1.

떠난 지 나흘 만에 쓴다. 앞으로 계속 여행의 잡설을 이어갈 힘과 정신머리가 있기를.


2.

2016년 12월 14일에 비행기 바퀴가 인천공항에 닿았다가 2019년 12월 9일에 다시 떴으니, 며칠 상간으로 딱 3년을 채웠다. 일부러 그렇게 맞추려고 한 것도 아닌데, 3은 역시 마법의 숫자인가.


3.

9일 밤 11시 50분에 필리핀 세부(Cebu) 막탄(Maktan) 공항에 도착했다. 꽤 많은 비행기가 그 시간 대에 도착해서 여권 심사대 앞에 공유를 쫒아가는 부산행 좀비만큼 엄청나게 긴 줄이 구불구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사를 보는 사람은 단 4명이었다. 통과하기까지 2시간 반 정도 기다려야 했는데 여행하며 여권 심사에 이렇게 오래 기다려 보긴 처음이다. 대부분 한국인과 중국인이었고 카밀 포함 가뭄에 콩 나듯 '서양인'이 보였다. 급한 한국인 성격 상 아저씨 한 분쯤은 '여기 관리자 누구야!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일 처리가 이래!' 하며 버럭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분위기는 차분했다. 이 상황이 의외로 다가오는 건 그만큼 '해외에서 진상 떠는 한국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겠지. 시간을 때우려고 '이런 상황에 왜 공항 측은 심사원을 더 투입하지 않을까', 혹은 가뭄의 콩 중 하나인 러시아 남자를 보며 '저 깡마른 러시아 남자는 왜 히틀러 머리 스타일을 선택했을까'에 대해 카밀과 실없는 시나리오를 늘어놓으며 낄낄대다가 결국 그것도 약발이 떨어져 그냥 팔짱 끼고 멍만 때렸다. 몰라, 아무도 그 시간에 일하려고 하지 않았겠지. 미루는 과감히 줄에서 벗어나 구석 벽에 기대어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아이들과 (물론 처음 만난 아이들) 쎄쎄쎄를 하며 놀았다.

- 엄마~ 나 저기서 놀고 있을게.

그래, 네가 현명하다.


4.

여행의 시작을 기다림으로 열었다. 앞으로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태반이겠지. 왜 기다리는 지도, 뭘 기다리는지도 모를 때가 많겠지. 잊지 말라고 처음부터 경고하는 것 같다.


5.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시 떠나기까지 뭘 그리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치매는 기다린다고 좋아지는 게 아닌데, 카밀이 언어의 벽을 극복하고 한국에 마음을 붙이는 것도 기다린다고 되는 게 아닌데, 한국에서 지낸 3년 동안 난 그저 뭔가가 일어나겠거니, 그리고 그 뭔가가 상황을 바꾸겠거니, 막연히 기다렸던 건 아니었을까? 기다려서 되는 일이 있고 기다려봤자 소용없는 일이 있을 텐데, 어찌 보면 천하태평이고 어찌 보면 안일하고 어찌 보면 대단한 깡이다. '기다림'이란 주제를 생각할 때마다 난 자연스레,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무엘 베케트 작 '고도를 기다리며'의 에스테라공과 블라디미르를 떠올리는데, 난 항상 내가 그 둘 중 한 명인 것 같다. 아~ 진짜 인생은 부조리인가! 도대체 난 뭘 기다리고 왜 기다리는가!


6.

12월 9일에 떠나기로 한 건 순전히 카밀과 한 말다툼 끝에 충동적으로 누른 마우스 클릭의 결과였다. 이 날의 비행기 표가 제일 쌌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세부 공항에서 2시간 반 기다림 끝에 마주한 검사원의 얼굴은 생각보다 친절했으며 여권 심사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여권에 적힌 미루의 성이 아빠 성이 아닌 내 성이라서 우리가 가족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꽤 많이 준비했는데 말이다. 기다림의 마지막은 항상 이렇게 허무한가 보다.


7.

아무튼 떠난 지 나흘 째, 난 모알보알(Moalboal)이란 곳의 한 게스트 하우스 해먹에 누워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랜만에 써서인지 잘 써지지도 않고 잡생각이 이어지지도 않는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잇는 시간이 유난히 길다. 이 또한 기다려야 되나 보다. 평생 기다리다 죽으려나?


오늘은 여기까지.

안 써지는 거 하염없이 기다리며 붙잡느니 과감히 비행기 티켓 구매 버튼을 눌렀던 그때의 손가락처럼 그냥 과감히 컴퓨터를 닫아버리련다. 미세먼지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말 그대로 에메랄드 빛 투명한 바다를 보며 그동안 쌓인 피곤 먼저 풀어보련다. 계속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이렇게 어설픈 글로 다시 시작하는 노마드 라이프의 기록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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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설 대신 여행의 잡설을 시작합니다. 그 전의 여행 이야기는 브런치 북 '공항에서 당신이 한 마지막 질문'과 매거진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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