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경과 혜선]
진경은 목적 없는 비공식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듣고는 곧 잊어버리는 잡담이나 늘 반복되는 사람들의 넋두리에 지쳐있었다. 가끔 동료들과 어색한 공간에 남겨지는 순간에는 상대가 이야기를 할 때까지 숨 막히게 기다렸다가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가 무엇이든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로 의미 없는 맞장구를 치고 잊어버리곤 했다.
오늘의 작은 사건들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매 순간을 노려보고 시간의 한결 한결을 모든 감각으로 만지고 지나가고 싶어 했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본 일도 없도 느리게 천천히 시시덕거린 적도 없었다. 매 시간을 촘촘히 사용하고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느라 때로 한가해 보여도 머릿속에는 말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늘 미간에 주름을 그리고 무엇인가를 노려보거나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 진경에게 혜선은 멍청이같이 시간을 보내는 인물로 보였다.
좋고 싫은 것도 없어 보였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오늘은 너무 인색해서 싫던 사람이 다음번에는 알고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하거나 자신은 의리가 중요하다며 자신을 배신했다고 누군가를 비난하다가는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제일 소중하잖아”
하면서 배신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곤 했다.
진경은 혜선의 이야기를 숨죽이며 집중해 듣다가는 때로 김이 빠져 눈을 떨구고는 풉 실소를 할 때가 있었다. 뭐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 기쁘고 별일도 아닌 일이 슬프고 서운한 혜선,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서 편했지만 때로 대책 없는 무모함이 진경의 눈에는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진경은 알고 있었다.
진경과 혜선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로 안부를 묻고 함께 저녁 한 끼를 먹는 사이이다.
고등학교 1학년 우연히 옆에 앉은 이후로 관심도 애정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는, 그래서 다툼도 없는 사이라고 진경은 생각했다. 2학년이 되어 다른 반이 되었다가 고3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었어도 진경은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고3이 끝나갈 무렵
“진경, 고등학교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아. 나와 그래도 한 번 더 짝을 해 주면 안 될까”
라는 혜선의 말을 멍하니 바라봤다.
굳이 뭘 그런 의미까지 두고 그러나 싶었지만 처음으로 혜선은 진경과 다르게 서로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괜스레 미안해졌고 그때 처음 진경은 혜선에게 몸을 돌려 천천히 쳐다보았다. 꽤 매력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한 번 더 짝을 해주면 안 될까’라는 말을 부끄러움도 없이 하는 혜선이 신기했다.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할지 모른다. 그 이후에도 진경은 혜선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옆에 있어 주기를 갈망해 본 적도 있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각자의 일을 찾은 후에도 진경은 혜선이
“우리 본지 오래됐으니 한번 볼까”
하면 시간을 내는 정도였다.
서로에게는 너무도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다른 관점과 방식에서 조언을 얻곤 했다.
진경의 삶에 혜선이 들어와 본 적은 없었다. 단지 진경의 입을 통해 해석된 삶을 듣고 이해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경이 옳았다.
혜선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진경이 혜선의 삶에 들어가 본 적은 없으며 오직 혜선이 해석하고 아쉬워한 대로 늘 바보 같은 결정을 하는 것뿐이었고 진경은 혜선을 그대로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