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를 보내려고 오랜만에 우체국에 들렀다. 집 근처에 있는, 직원이 네댓 명뿐인 작은 우체국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창구직원들은 마치 오디션 심사위원이라도 된 듯 나를 지켜보았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라 손님이라곤 나 혼자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오디션에 참가한 배우가 된 듯 약간 긴장이 됐다. 창구 왼쪽에는 물건을 담을 종이상자들이 크기별로 다양하게 놓여 있었다. 적당한 것을 골라 접힌 상자를 펴서 아랫부분을 유리 테이프로 봉하고 가져간 물건을 넣은 후, 윗부분도 테이프로 단단히 막았다. 끝으로 상자 겉면에 발신인과 수신인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를 적어 마무리했다. 나는 완벽한 연기의 마침표를 찍듯 완성된 택배 상자를 저울에 올려놓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상자를 확인하던 직원의 한 마디는 뿌듯한 기분을 연기처럼 날려 버렸다. “상자 겉면에 개인정보는 적지 않으셔도 돼요.” 직원이 말한 개인정보란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를 말하는 것이었다. 무대 위 연기자에게 점수를 매기듯 나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알려 주는 직원이 없었다는 것에 기분이 순간 가라앉았다. ‘아니 그러면 적지 말라고 안내해 주셨어야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다. 이런 경우, 나의 뇌는 다음 문구가 즉각 떠오르도록 명령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 일곱 글자는 마치 마법의 주문과 같아서 부당함을 따지려고 끓어오르던 마음을 차갑게 식혀버린다. 그렇게 되면 상황은 그냥 그것으로 싱겁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있다며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그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일곱 글자로 된 주문은 자질구레한 일에만 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막내딸이 급한 약속이 있다기에 차에 태워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차가 다가오더니 내가 자기 차를 접촉사고 내고 달아났다며 갓길에 차를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없어 황당했지만, 딸을 택시 태워 보낸 후, 보험사 직원을 불러서 함께 블랙박스를 확인했다. 블랙박스 안에는 전혀 엉뚱한 차량과의 접촉사고 기록이 저장돼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부당함을 따지기보다는 그 주문을 걸어 쿨하게 보내주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잇몸이 붓고 통증이 심해서 진료를 받으려고 했더니 토요일 오후라 다니던 치과가 문을 닫았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해 낯선 치과 한 곳을 찾아가 진료를 받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가 입안을 대충 살피더니 곧바로 마취 주사를 놓았다. 나는 그저 잇몸의 염증을 치료해야 하니 마취가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마취되니 통증과 감각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감각을 잃은 나는 벌려진 입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의사가 벌인 일은 놀랍게도 잇몸치료가 아닌 발치였다. 어떤 설명도 없이 내 어금니 한 개를 뽑아버린 것이었다. 호통을 치며 분개할 일이었으나 의사가 이를 뽑은 이유를 설명하자 나의 뇌는 그 순간에도 일곱 자의 주문을 걸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뒤차가 내 차의 꽁무니를 들이받아도, 미용사가 머리카락을 마음대로 잘라 놓아도 여지없이 주문을 거는 것이다. 나는 주문을 걸게 되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대리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대리인. 그러니까 나를 대신해서 감정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표현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대리인을 이 우체국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느 때처럼 창구직원을 보며 속으로 '뭐 그럴 수도 있지' 주문을 걸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우체국 문을 대차게 열고 들어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내지르는 소리로 보아 오십 중반쯤 되지 않나 싶었다. 키는 작았으나 다부진 데가 있는 여자였는데 자기가 무시당했다며 꽤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그 여자가 내게 일곱 글자의 주문을 걸게 한, 그 직원을 향해 자기가 만만해 보이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모르니 그녀의 분노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길이 없으나 그것이 궁금할 리 없었다. 나를 대신해서 창구직원을 꾸짖고 있는 그녀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녀는 한 번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참을 퍼붓고 나갔다가 도로 들어와 다시 일장 훈계를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진즉 볼 일을 마쳤음에도 내 대리인의 속 시원한 분풀이를 듣기 위해 괜스레 종이상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연기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