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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잠수함 Aug 17. 2023

무거운 침묵

 통영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이다. 가장 높은 층이 23층인, 어느 콘도에서 묵게 되었다. 두 밤을 머무른 후, 셋째 날 아침에 퇴실하려고 일행과 짐을 챙겼다. 시계는 열한 시를 십분 가량 남겨 놓고 있었다. 퇴실해야 하는 시각이 열한 시이기도 했지만 다음 일정을 예약해 둔 터라 다들 마음이 급했다. 일행 중 하나가 퇴실 시각당기위한 제안을 했다. 한 사람이 남아서 객실 뒷정리를 하고 나머지는 먼저 로비로 내려가 숙박비를 계산한 후, 차에 짐을 싣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모두 동의했고 내가 자원하여 남기로 했다. 일행이 나가자 객실을 대충 정리하고 혹시 빠트린 물건이 없나 확인한 후, 모아 놓은 쓰레기들을 가져가 분리배출까지 마무리했다. 그리고 서둘러 승강기를 타려는데 퇴실 시각이 임박해서인지 승강기 앞에는 나 말고도 내려가려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승강기가 내가 있는 5층까지 내려오기도 전에 '만원(滿員)'이라는 빨간 불을 켜며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좌우에 각각 두 대씩 모두 네 대나 있었는데 하나같이 그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모두 비상계단으로 내려가 버렸다. 나도 계단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오십견 때문에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들고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방을 일행 편에 맡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었다. 덩그러니 남아 언제 올지 모를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는 내 처지가 딱했다. 하지만 승강기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인정머리 없는 만원(滿員) 두 글자를 보여주며 무심히 내려가고 있었다. 일행으로부터 빨리 내려오라는 독촉 전화까지 받고 보니 승강기에 올라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이내 두 대의 승강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23층에서 출발한 승강기는 대개 10층을 전후해서 만원이라는 불이 들어오곤 했다. 승강기 두 대 중, 한 대는 10층 가까이 오기도 전에 이미 멈추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머지 한 대가 만원 경고등울 끈 채로 5층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게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두 팔을 벌리듯 승강기 문을 열었다. 승강기 안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어 ‘만원(滿員)’ 경고등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평소 같으면 순순히 포기했겠지만 그럴 상황이 아닌지라 염치 불고하고 큼지막한 캐리어 가방을 들이밀어 겨우 발 디딜만한 공간을 차지하고서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나는 내 뒤로 밀려난 사람들의 어휴 어휴 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아마도 그때 그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5층이면 걸어내려 갈 일이지. 이 비좁은 틈에 낄게 뭐람.’ 그들이 성치 않은 내 어깨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인간이란 무엇이든 남아 돌 때는 교양 있는 척, 고상한 척하다가도 제 몫이 부족하다 싶으면 이기(利己)가 발동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한 사내가 내 생각을 엿보기라도 한 듯 ‘왜 만원 불이 안 켜지지?’라며 푸념했다. 그와 동시에 승강기가 4층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제가 지닌 적재 능력을 과시하려는 듯 여봐란듯이 문을 열었다. 승강기 앞에는 한 가족인 듯싶은 네댓 명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탑승을 포기했고 우리는 안도했다.


 승강기 문이 닫히자 어떤 사람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이젠...’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얼버무렸지만 그의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더 이상 승강기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은 곧 우리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승강기는 3층에 다시 멈추었다. 한 사람이 ‘또 서네.’라며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문이 열리자 체구가 왜소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왜소함이 큰 능력이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 제겨디딜 곳도 없는 승강기 안으로 몸을 밀고 들어왔다. 그러자 어휴 어휴 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승강기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이상의 실망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승강기는 2층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2층에서 승강기 버튼을 누를 사람은 없을 거라고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우리의 동의가 성급했음을 일깨워 주려는 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 또 멈추네.’ 그러자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2층인데....’라는 맞장구로 우리의 마음을 대변했다. 우리는 2층에서 승강기를 타려는 뻔뻔한 인간을 확인하기 위해 일제히 승강기문을 응시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승강기 안은 냉동고가 된 듯 한순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열린 문 앞에는 웬 백발의 노파가 휠체어에 앉아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옆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늙수그레한 남자가 짐 가방을 들고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염치없는 승강기는 그들을 남겨둔 채 야멸차게 문을 닫아 버렸다. 1층 로비로 향하는 승강기는 중량 초과된, 무거운 침묵을 함께 싣고 내려갔다. 1층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은 이 침묵에서 한시바삐 빠져나가기 위해 제각각 빈말들을 지껄이며 뿔뿔이 흩어졌다. 나 또한 그곳을 얼른 벗어나고자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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