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사일생 불갑산 종주기, 그리고 잠시 닻을 내리며
※ 몇 해 전, 불갑산행을 마치고 동행했던 분들과의 추억을 남기고자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직후의 감정이 담겨 다소 거친 부분이 있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함께 산을 오르는 기분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리산 뱀사골의 벅찬 감격으로 일주일을 살았고, 불갑산을 기다리며 일주일이 행복했습니다. 하늘은 양치기 소년이라도 된 듯 주말 비 소식을 전해왔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으름장에 속지 않았지요. 오히려 누군가 ‘우중산행(雨中山行)’의 운치를 운운하기 무섭게, 불갑산을 향한 열망을 담은 댓글들이 나뭇가지에 묶인 산악회 리본처럼 주렁주렁 매달리지 않았습니까?
마침내 불갑산 종주의 날이 밝았습니다. 우중산행도 불사하겠다는 우리의 당찬 결의 앞에 한풀 꺾인 것일까요. 하늘도 새벽녘에 잔뜩 풀어놓았던 먹장구름을 거둬들이느라 허둥지둥 분주한 모습이더군요.
차 안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노루잠을 자다 불갑산 발끝에 당도한 시각이 열 시 반 남짓. 산행 초입, 심해의 붉은 산호가 지상으로 환생한 듯 신비로운 자태의 꽃무릇을 기억하시나요? 하늘로 날아오르려다 멈춘 듯 촘촘히 피어난 그 붉은 꽃길을 걸으며, 우리는 상사화의 아픈 전설을 나누느라 애틋했지요.
불갑사 옆으로 난 덫고개로 향하는 길은 제법 가팔랐지만, 숨을 고를 만했습니다. 고개 위엔 1907년에 잡혀 박제되었다는 호랑이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동굴 속에서 튀어나올 듯 웅크리고 있었죠. 겁도 없이 그 등짝에 올라타 사진을 찍느라 정작 동굴 안은 들여다보지 못해 못내 아쉽습니다. 혹시 그 캄캄한 안을 들여다보신 분, 계신가요?
노적봉, 법성봉, 투구봉, 장군봉을 지나 정상인 연실봉에 이르기까지 땀과 쉼의 도돌이표를 찍으며 걸었습니다. 그 곁을 지켜주던 굴참나무, 굴피나무, 서어나무, 산벚나무들이 떠오르시는지요. 기특하게도 우리가 올 줄 미리 알고 제 몸 흔들어 발밑에 마른 잎을 수북이 쌓아 두지 않았겠어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 아스락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더디 오는 가을의 옷자락을 힘껏 끌어당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노루목을 지나 바위틈으로 겨우 몸을 빼내 밧줄에 의지해 오르내리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백팔계단 앞에 섰습니다. 백팔번뇌를 없애준다는 그 길. 하지만 우리는 단 하나의 번뇌조차 털어낼 새 없이 단숨에 연실봉 정상에 올랐지요. 표지석을 껴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으며 찍은 기념사진,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정상을 밟고 내려가는 길, 우리는 산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 가장 길다는 7코스를 택했습니다. 등산로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은 투박했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각양각색의 버섯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지요. 구수재를 지나 나팔봉에 닿았을 때만 해도 산행이 무사히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저의 눈물겨운 악전고투가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하산길 700여 미터의 아찔한 난코스가 덫을 쳐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가파른 내리막이 계속되자 보호대를 찬 오른쪽 무릎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없는 길을 더듬어 내려가느라 푹 눌러쓴 모자 안은 진땀으로 흥건했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의 분신과도 같았던 지팡이마저 허리가 뚝 부러지며 홀연히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지 뭡니까. 한순간에 패닉에 빠진 제 심정이 어떠했는지 아시나요? 유씨 부인은 바늘이 부러지자 <조침문(弔針文)>을 지어 애도했다지만, 저는 애도는커녕 저를 버리고 간 지팡이가 원망스러워 <원장문(怨杖文)>이라도 지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이정표에 적힌 ‘700m’는 필시 ‘1700m’를 잘못 적은 것이 분명하다며 투덜거리던 찰나, 갑자기 등산로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던 호랑이 울음소리는 또 웬일입니까! 육신이 지치면 정신마저 피폐해지는 법. 차라리 씩씩한 군가를 틀어줄지언정, 뜬금없는 호랑이 소리로 사람 혼을 쏙 빼놓다니요.
길은 있으나 출구는 묘연했던 그 험로를 빠져나와 평지를 밟는 순간, 머릿속엔 오직 네 글자만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구·사·일·생(九死一生)’
이번 불갑산행이 제게 남긴 뼈저린 교훈은 이렇습니다.
‘새로 난 길은 쳐다보지도 말 것. 남들 다 다니는 안전한 길로만 다닐 것.’
기대와 환호, 고통과 분노가 스펙터클 하게 교차했던 불갑산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나저나 튼실한 지팽이 하나 장만혀야 다음을 기약하것구만요. 요놈의 무릎팍은 언제쯤이나 다시 싱싱해질랑가 모르것소.”
[잠시 항해를 멈춥니다]
작가님, 반갑습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매주 목요일 아침,
작가님과 함께한 시간은 제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빠짐없이 글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작가님의 따뜻한 관심과 응원 덕분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제 잠시 항해를 멈추고
닻을 내립니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닦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더욱 단단해진 문장을 싣고
머지않아 다시 닻을 올리겠습니다.
작가님의 건필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노란 잠수함 올림
이미지 출처 : 노란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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