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는 그에따른 반작용 이외에 연결선을 가지는 라인이 있다. 바로 ’인연 (因緣)‘ 이란 것이다. 아무리 작은 손짓 하나에도 그에 걸맞는 연결라인이 형성되며 아무리 외면해도 그 연결점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친숙한 느낌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 그 모든 느낌들이 감춰진 인연의 드러남 표식들이다.
내가 글의 포스팅 제목을 최대한 안 멋있고 주목을 안끌게끔 고의로 흘려 적는 이유가 있다. 단편 검색으로 들락거리는 익명뒤에 숨은 사람들에게 나의 사적 이야기가 노출 되는것이 싫기 때문이다. 즉 대중 상대라기 보다는 그 중에서도 인연이 닿는 분들에게만 내글을 보이고 싶은 심정 때문에 최대한 내용을 분산시켜 장기간 미로를 짜고 검색이나 대중들의 주목을 끌만한 요소들을 피하고 없앤다.
구질구질하게 사는모습 내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나이 다 먹고서 말이다. 최대한 이목을 끌고싶지 않은것이 못 생겨서 죄송하다며 ‘조용히 살고싶다’ 돌아가신 그분의 말씀인데.. 그럼에도 글을 적어라 기록을 남겨라 내면에서 끝없이 요구하는 공감의 임무(?)를 궂이 거부할 필요가 없어서다. 벼랑끝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한다. 생명을 얻는것이 나에게도 좋고 모두에게 이롭다면 더욱 그렇다. 주어진 제한된 환경안에서 그나마 할수있는걸 한거다.
워낙 오랜기간 많은 기록을 남겼기에 인기가 없음에도 누적 방문객이 백만명은 넘어갔는데 최대한 이목을 끌지 않으려 일부러 노력한 결과다. 일정비율로 매일 검색 단어 쫒아 엉겁결에 들어오는 방문객들은 별 인연닿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담소 나누고 싶은데 들락날락 지하철역에서 하는것 같은 기분드는것이 오픈된 공간의 단점이다.
*진통제 약물극복 기록에 마약 구하려고 정보찾는 방문객이 많은들 서로 좋을것이 없다. 심하게 몰려 부작용이 생기는 포스팅은 어쩔수 없이 발행취소를 한다. 내가 쳇지티피가 아니다.
목숨이 달랑 거리는 요양중엔 최대의 적은 스트래스다. 스트레스 받고 신경쓰다 보면 요단강 건널수도 있을거란 생각에 조용히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 기본 마인드인데 그게 십년이 되어가니 이렇듯 분량이 방대해 졌다.
단편 검색이 아닌 오랜기간 나와 함께 죽음의 강이 흐르는 시간들을 함께 공감하며 건너온 소수의 구독자 분들은 그만큼 나와 보이지 않는 인연의 줄이 생긴것이라 봐도 된다. 내가 찾아낸 생명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얻을수 있을것이다. 그런 소수의 공감줄이 있음에 십년 가까운 시간들을 죽음과 마주본채로 해야할 말들을 기록해 나갔다고 본다.
외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은건 아무때나 방안에서 다 해버릴수 있으니 정말 편리한 세상이다. 어차피 몸도 내장들 다 도려내고 껍데기만 남아 시체처럼 되 버렸겠다. 기록 남기는것이 어려운것도 아니고 귀찬이가 찾아 오는것이 글쓰는덴 도움이 된다. 안 움직이고 그냥 퍼질러 져서 스마트폰 들고 엄지 독수리로 톡톡 아무데서나 타이핑만 하면 되니까..
대신 귀찬이는 꼭 청소하려고 할때만 찾아와서 청소는 계속 미루기만 한다. 귀찬이 왔네? 귀찬이 왔는데 글이나 쓰자 그런거다. 방대한 브런치 기록의 일등공신은 귀찬이다.
방안에서 편안하게 주저리 주저리 몇년간 하고 싶은 말 내뱉었는데 그에 따르는 파장들도 점점 결산되야 할 시점이다. 지난 기록들에서 크게 잘못 방향을 잡고 방황하는 부분 없이 한결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이 보인다면 임무를 잘한것이고 지나고 보니 쪽팔려 내뱉은 말과 기록을 지워야 한다면 개인 일기장에나 끄적대는 낙서로 대중들한테 공개하면 안되는 후회할 짓을 벌렸단 것이다. 즉 잘못한 길을 기록한거다. 지운다고 한번 뱉은 파장이 없는듯 사라질까? 천만에다. 파장을 내보내 남이 받았다면 공감이냐 거부냐 이미 상념의 에너지가 꼬이고 반응해 크고작은 인연이 만들어 지게 된다.
거진 십년전 기록들도 그다지 삐뚤어진건 없으므로 그럭저럭 잘했군 잘했어
순전히 에고의 개인적 느낌을 기록으로 남길때는 귀찬이 대신 심심이가 왔을때인데 주로 날씨와 연관있다. 밤되면 눈 초롱해지는 고양이들 본능처럼 비오거나 햇살 나른하면 심심해지고 감정이 센치해 지는거다. 현실을 보고 인연의 근원을 생각해 보는것도 추억이 이른거릴때 이다.
오랜세월이 흘러도 끊어지지 않는 질긴 인연들에 대헤서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고 어떻게 진행시켜 잘 마무리 질것인가 나이가 차니 뽑기판 앞에서 최대한 기간 연장을 시키고 우유부단을 즐기는것 같다. 악연 같지만 젊은날 인연들이 또 사라지면 살아온 인생이 아쉽고 그런거다.
싸우는것도 오래되면 정이 든다고 한다. 그건 연로하신 부모님들 보면 바로 안다. 대부분 친구 친척 가족들간의 연들이 그러하다. 형제간에도 어릴땐 싸우면서 크지만 철들면 형제간 우애가 좋은 경우 많다.
수천년 인연에 얽힌 거미줄들을 보고 있으므로 난 벌어지는 현상과 감정들을 이해하지만 상대에게 그 이해를 공감 시키거나 강요 할수는 없다. 그들에게 나의 반응은 이해못할 4차원일 뿐이다. 각자 바라보는세상과 눈높이가 다른것은 어쩔수 없는것이다.
희노애락 번뇌를 즐기는 자들이 같이 번뇌를 공유하자는 요구가 그들이 말하는 친목이다. 나를 위해서 라는 그들의 심정은 이해하나 서로 살아가는 재미가 다른데 날 이해 못한다고 투정해 봤자다. 누구나 술먹고 춤추고 노래방 가는걸 스트래스 해소로 여기진 않는다는걸 알아야 한다. 나에겐 도리어 소음과 광기로 인한 스트래스 받는일이다. 꼭 나이를 먹어서 그런건 아니다. 귀찬이랑 어릴때부터 친해서 그런거다.
인연이라 한다면 계속 공놀이를 하며 카르마를 주거니 받거니 하기 보다는 최대한 좋은 맺음으로 마무리 되는것이 나에겐 가장 편하다. 악연도 좋은 인연으로 바꾸고 좋은 인연은 악연이 되지 않도록 더 신경쓰고 노력해야 한다. 잘못은 그래서 계속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애정도 자칫 악연으로 변질될수 있을테니 말이다.
수많은 이혼들이 말하는 바 대부분이 악연이 아님에도 욕망과 감정에 농락 당하다 보면 애정도 악연으로 끝을 맺는다. 헤어짐에도 아쉬움이 있다면 마무리가 어설펐을뿐 궂이 악연은 아니라는 거다.. 이혼후 줄곧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달고 사시는 노년의 어머니 말에서도 이제는 미움을 발견할수가 없다.
오랜 인연과 카르마 앞에서 나의 요구는 단순하다. 계속 문제 낸것에 대해 나 또한 답변을 했으니 맞았는지 틀렷는지 맞았다면 이제 열쇠를 내달라 이다.
역시 표면적 바램과 귀찬이가 말하는 바가 다르다. 오랜 인연 앞에서 귀찬이는 항상 우유부단과 기간연장을 즐긴다. 악연 같지만 결판짓고 싶지 않은 뭐랄까.. 젊은날의 초상 같은것? 인연이 새로운 갈등으로 끌고가려 함인데 새로운 갈등의 전개냐 끝맺음이냐 결단을 미루고 또 미루고.. 귀차니즘을 영어로는 ‘Lazy’ 라고 한다.
귀찬이 핑계좀 그만해 너가 문제잖아 ! 어떻게든 결단을 내리란 말이얏!
항상 야단을 치는건 나지만 그래도 귀찬이가.. 나 때문에 그러는게 아니라 정말 귀찬이 땜에 그러는거다. 카르마에 함께 엮인 오랜 인연들은 그리 쉽게 끊어지는게 아니다. 오랜시간 함께했던 추억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면 더더욱 그렇다. 어떻게 마무리 짓고 무엇을 남기느냐.. 고민해 볼때 귀찬이가 내린 결론.
나포함, 전부 모든것이 ‘<행복> 했음 좋겠어’
언제나 그런거다. 줄초상 치루고 초토화 될뻔하던 집안이 안정돼 당장 아무일도 생기지 않음이 다행스럽고 아직은 모두가 행복하지 않음이 귀찬이가 내세운 우유부단의 이유라 할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