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에픽하이 콘서트 후기
나는 예전부터 에픽하이 세 사람이 수다 떠는 콘텐츠를 정말 재미있게 봤지만, 그 유머가 그들의 오랜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25년 에픽하이 세 사람의 캐릭터와 유머코드를 내세운 유튜브 콘텐츠 ‘에픽카세'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에픽하이가 한창 히트곡을 내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잇대의 팬들이 대거 생겨났다. 매년 이들의 콘서트에 출석하던 사람들, 이들을 2025년에 새로 알게 된 사람들에 이어 이 팀을 알고 있었지만 잠시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까지 유튜브를 계기 삼아 달려오면서 이번 연말 콘서트 예매 대기열에는 전에 보지 못한 규모의 인원이 모였다.
그렇게 전례 없이 다양한 구성의 역대 최대규모 관객을 맞이하게 된 에픽하이는 올해 어떤 연말 콘서트를 준비했을까? 공연 하나로 유튜브 유입자부터 고정 팬까지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 궁금증을 안고 12월 28일 ‘막콘'을 보러 핸드볼경기장으로 향했다.
멤버 세 사람의 입장과 함께 흘러나온 오프닝 섹션의 ‘수상소감' - ‘Dear TV’ - ‘막을 올리며' 는 결코 입문자 친화적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게스트 출연 전까지의 세트리스트는 ‘BORN HATER’, ‘Love Love Love’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이들의 수록곡을 다 들으며 이들의 힙합 팀으로서의 면모를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한 곡들이었다. 초반 배치된 ‘Top Gun’ 이나 ‘악당', 중후반부에 흘러나온 ‘선곡표'는 매년 에픽하이 콘서트에 출석하는 팬들의 신청곡을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우 의외의 선곡이었다.
하지만 이 곡들을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공연 초반이기에 가능한 집중력과 밴드 셋의 타격감이 더해져 이 세트리스트에 충분히 매료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2023년 20주년 콘서트의 ‘Map the Soul’, ‘연필깎이', ‘BLEED’ 구간에서 밴드 셋, 특히 리얼 드럼의 타격감이 곡의 감흥을 두세 배로 만들었는데, 이 구간을 중반에 배치한 2023년과 달리 이번 공연에서는 관객의 집중력이 가장 큰 초반에 이 타격감이 극대화되는 곡을 배치하여 공연 전체의 방향성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웅장한 분위기의 ‘막을 올리며'나 ‘Prequel’에 밴드 셋이 가미한 타격감은 황홀했으며, 록에 가까운 편곡을 가미한 ‘Dear TV’, 기타 사운드의 입체성이 원곡에 역동성을 부여한 ‘노땡큐'도 밴드 셋을 활용한 이유를 보여주는 곡들이었다.
이와 함께한 스크린과 조명 연출이 공연의 몰입감을 극대화했다. 같은 핸드볼경기장에서의 세 번째 콘서트지만 2025 콘서트가 역대 최대의 수용 인원을 기록한 만큼, 타워형 무대의 스크린이 유독 커지고 조명 연출 역시 더욱 다채로워졌다. 에픽하이 콘서트를 여러 차례 관람했지만 2층에 가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플로어 중간에 돌출 무대를 길게 깔고 플로어 전체를 배경으로 조명을 활용했다 보니 2층이 무대 연출을 온전히 감상하기에 더 좋았다. ‘Top Gun’, ‘부르즈 할리파' 같은 화려한 곡의 시작 지점마다 유독 강렬한 스크린과 레이저를 사용하고, 게스트 퇴장 이후 ‘Fan’ 직전 인터루드 ‘Love/crime’에 맞춰 본격적인 레이저 쇼를 보여주는 등 관객이 공연의 흐름을 따라올 수 있도록 조명을 사용한 점이 돋보였다. 2층 객석을 향하는 레이저 조명이 자주 사용된 공연 특성상 정면이 아닌 사이드 자리에 앉아도 만족스러운 관람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좋았다.
이처럼 힙합 그룹으로서의 에픽하이를 타격감 있게 보여준 뒤, 게스트 퇴장 이후 ‘술이 달다'부터 ‘트로트'까지 이어진 구간은 히트곡의 무서움을 새삼 느끼게 했다. 보컬 피쳐링 구간에서 마이크를 대부분 관객에게 넘겼는데, 스크린에 가사를 띄운 것을 감안하더라도 공연장에 노래방을 개장한 듯한 호응이 연이어 이어진 건 놀라웠다. 차트 성적이 좋았던 히트곡들이지만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무드의 곡이 비교적 일관되게 이어졌는데, 이 시간을 관객과 가깝게 교감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여 지루함을 덜어낸 것이 좋았다. 2층 곳곳을 누비는 미쓰라진과 투컷이 멀리 앉은 관객도 주의력이 흐려지지 않도록 유도한 점이 2층 관객으로서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이번 콘서트에는 전 곡을 다 부르지 않고, 여러 곡을 중요 구간 위주로 이어붙인 구간이 꽤 자주 있었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게스트 3곡과 인터루드 1곡을 제외하고 총 31곡을 불렀지만 듣는 입장에서 지루할 틈이 없도록 매끄럽게 편집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곡당 러닝타임이 길던 시절 발매된 곡들을 숏폼 시대 청자의 집중력에 맞게 재배치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한편, DJ를 정식 멤버로 보유했음을 보여주는 매쉬업도 돋보였다. ‘막을 올리며'를 부르는 중간에 ‘LATE CHECKOUT’을 배치하고 ‘Love Love Love’ 간주에 이 곡을 샘플링한 식케이, 릴 모쉬핏의 ‘LOV3’을 끼워넣어 샤라웃한 것 역시 공연장에서만 가능한 재미를 준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특히 ‘Love Love Love’의 경우 ‘LOV3’ 매쉬업에 더해 숏폼에서 갑작스레 시작된 챌린지까지 반영하며, 팀의 최대 히트곡이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도록 공연장에서 업데이트를 가미한 점이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에픽하이를 상징하는 중요 히트곡들과, 에픽하이 콘서트의 정체성에 가까운 뛰놀기 위한 곡들은 함부로 잘라내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High Technology’ 시작 전 리액션 강의가 진행되니 새삼 이번 콘서트에 많아진 신규 관객의 존재를 실감했는데, 이후 ‘One’, ‘New Beautiful’, ‘Don’t Hate Me’가 이어지며 내가 알던 에픽하이 콘서트답게 신나는 모습이 펼쳐져 반가웠다. 이 구간에서 뛰면서 떼창하는 게 에픽하이 콘서트를 매년 가는 사람들의 목적에 가까운데, 아마 이번 공연에 처음 온 사람들이 이 구간의 짜릿함을 모두 온전히 느끼며 기억하고 갔을 것 같다. 앵콜로 ‘Paris’를 듣는다는 소원을 이루고 ‘Fly’, ‘우산', ‘사진첩'으로 이어진 앵콜이 끝나니, 신나는 공연 한 판 잘 보고 간다는 포만감이 들었다.
오프닝이 끝나고 이어진 멤버 소개 파트에서는 멤버들의 이름으로 캐롤을 개사해 불렀는데, ‘징글벨'에 맞춰 “김김김정식~ 김김김정식~” 하는 것을 보고 나도 빵 터졌다. 이들은 세션 소개 때 스크린에 각 연주자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띄우고 앵콜 소개 VCR을 ‘에픽카세' 포맷으로 찍었으며, 파노라마 촬영 기술을 내년에 뜰 신기술이라 우기고는 공연이 끝나고도 다음 주 유튜브에서 보자는 말까지 했다. 초록색 대형 ‘박규'와 ‘블로지옥' 포토존이 펼쳐진 공연장 초입과, ‘박규봉'을 들고 듣는 유머가 어떤 어이없음의 줄기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공연 연출의 일정 부분은 유튜브의 유머러스함을 공연장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배려겠지만, 실은 팀이 원래 가진 유머코드가 유튜브에 녹아들었기에 ‘에픽카세' 콘텐츠와 공연이 일관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콘텐츠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언제나 유머를 내세웠는데, 그게 하루이틀 된 일이 아니었다. 영화 포스터 속 인물을 코스프레하여 공연 포스터를 찍는 건 2015년 <현재상영중> 콘서트가 시작이었고, 투컷이 자기 휴대폰 속 타블로의 프로필 사진을 그 ‘크라잉 트리' 캡쳐샷으로 지정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드러낸 곳은 6년 전 라이브 방송이었다. 그래서 내게 ‘에픽카세' 콘텐츠는 이 팀의 유머러스한 면모를 아주 약간 크게 보여준 것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저럴 줄 알았다' 싶었다.
오히려 유튜브 콘텐츠 속 팀 내 역학관계와 유대관계가 음악에 녹아들어 몰입감을 높였기에 ‘에픽카세'의 흥행이 공연 관객을 유의미하게 늘릴 수 있었을 거란 확신이 든다. 이들이 노는 모습에 무슨 질서가 있겠나 싶겠지만, 자세히 보면 멤버별 역할 분배와 캐릭터 차이가 명확히 보인다. 독한 소리로 타블로 속을 긁으며 시청자의 웃음을 터뜨리는 투컷의 발언 앞에는 투컷이 팔짝 뛸 부분을 정확히 골라 긁는 타블로가 있고, 서로가 서로를 긁는 삭막하기 그지 없는 풍경 뒷편에는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미쓰라진이 있는데 이 구도가 음악 활동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 자기 주장 강한 타블로와 투컷이 각자 한 장씩 프로듀싱한 2CD 앨범 “Remapping the Human Soul”과, 투컷의 비트에 타블로가 멜로디를 올린 ‘연애소설'을 이어 보면 이 팀의 역학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에픽카세' 유입 팬과 에픽하이의 오랜 팬을 ‘에픽하이 유니버스'의 주 전장인 공연장에 모여들게 한 결과물이 2025년 콘서트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2025년 에픽하이 콘서트에는 현재의 에픽하이를 어떤 사람들이 지지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많았다. 공연 끝나고 만난, 에픽하이 콘서트에 매년 출석하는 친구는 공연 이후 택시 승차장이나 주차장의 인파가 예년 대비 확실히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경제력이 부족한 어린 나잇대의 팬층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덧붙였다. 인터넷에서 봐 온 팬 연령층의 하향 추세가 공연장에도 그대로 드러난 게 놀라웠다. 2014년 입문 이후 내가 주로 만나온 팬들은 ‘Fly’나 “Remapping the Human Soul” 발매 당시를 기억하는 이가 대다수였는데, 유튜브 흥행 이후 ‘Fly’는 커녕 ‘BORN HATER’ 발매 당시도 기억하지 못할 나잇대의 팬들이 등장해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워졌다.
에픽하이가 유독 청소년 팬층과 호흡할수록 빛나는 곡을 많이 가진 만큼, 지금 시대의 청소년들이 이 팀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게 무척 반가웠다. 에픽하이 팬 절대다수가 사춘기 시절을 이 팀과 함께했고 나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이유 없이 싫어지고 모든 감정이 크게 다가오는 그 시기에, 뭔가 이유 있는 듯한 저항가와 예사롭지 않게 날 선 소리의 예민함이 조응하곤 하니 ‘중2병이면 에픽하이다' 같은 세평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들에게 청소년기의 적잖은 빚을 진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아주 잘 사는 괴짜'들의 존재가 하루하루의 부딪힘에 큰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도저히 세상에 잘 녹아들 것 같지 않을 듯한 이들이 소수자 지향적 정서의 음악을 만들어 세상에 발 붙여 살아가고 있으니, 지금 위태로운 자신에게도 삶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앉은 구역에는 중국인 팬들이 여럿 보였다. 내 왼쪽에 앉은 내 또래의 중국인 여성 팬 분은 멘트 대부분을 알아들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숙하셨는데, 게스트로 박정현이 나오자 그 능숙한 한국어로 “저 사람 유명해요?” 라고 물어봤다. 박정현이란 가수의 존재를 이 공연장에서 처음 아신 이 팬분은 조금 뒤 박정현이 ‘Someone like You’와 ‘꿈에'를 부르자 나보다도 더 크게 좋아하고 있었다. 이 팬분께서는 2층에 투컷이 올라오자 방향을 못 찾는 내게 투컷 위치를 가리켜 주셨고, 공연이 끝나자 “재밌었어요!”를 외치셨다. 나는 이 팬분께 박정현이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정보를 전달하고, 멘트 중 나온 이분이 잘 모르는 단어 ‘손절'을 알려드렸다. 한국 공연장에서 외국인 관객과 대화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좀 신기했다.
에픽하이는 코첼라에 그간 두 차례 출연하고 여러 차례 해외 투어를 치루는 등, 해외 청자 확장에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이들은 비-아이돌 아티스트이지만 아이돌 기획사에 소속된 적이 있고, 여러 아이돌들의 롤 모델로 손에 꼽혀 온 이력을 바탕으로 인지도를 얻는 등 케이팝의 글로벌화와 함께 발을 맞추어 활동 범위를 넓혔다. 또한 타블로는 솔로 명의로 중국 아티스트와 콜라보레이션 싱글을 발매하고 중국판 ‘쇼미더머니’로 알려진 ‘랩 오브 차이나'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는 등 중국 활동을 조금씩 해왔다. 그래서 ‘에픽카세'가 본격적으로 흥행하기 전까지, 한동안 타블로의 SNS 댓글창에는 해외 케이팝 팬들이 달아 둔 영어 댓글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SNS 댓글에 외국인 비중이 그렇게 높다면 이들을 보러 한국 공연에 오는 외국인 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실제 공연장 풍경도 그렇다.
하지만 에픽하이 콘서트의 분위기를 만드는 밑바탕에는 결국 이들과 매년 연말을 보내는 단단한 팬층이 있다. 해외 활동이 활발한 팀이지만 이들의 1년치 공연 중 가장 큰 회장은 결국 한국에 잡히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에픽하이를 보고 자라 그들과 함께 나이 먹는 사람들의 존재다. 이들처럼 웃지 못할 시간을 견디게 해 주는 공감과, 상쾌한 추억을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에너지를 같이 선사하는 사람들이 또 없으니 고정 팬이 꾸준히 유지되는 것 아닐까 싶다. 나도 어느새 이들과 함께 나이 먹는 팬 반열에 들어갔다는 것을 올해 새삼 느꼈다.
나는 희한하게도 에픽하이의 활동 중 큰 이벤트와, 내 인생 중대사를 함께 맞곤 했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니라 10년이 넘도록 여러 번 그랬다. 8집을 고등학교 입시, 9집을 대학 입시와 함께했는데 10집을 필진 데뷔와, 20주년 콘서트를 취업 준비와 함께했다. 이번 콘서트도 마찬가지로 공연이 있는 그 전 주에 이직 오퍼가 들어와, 공연 이틀 뒤 이직 면접이 잡혔다. 여기 나열한 중대사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주변 상황이 꽤 어지럽다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크리스마스 날 좋아하던 선배 필자 분의 빈소를 갑작스레 다녀와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여기 적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내가 원하던 것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에픽하이를 부적에 비유한다. 당장 20주년 콘서트 가는 지하철에서 석연치 않은 면접 탈락 통보를 받았는데, 공연 끝나고 이틀 뒤 직장 입사 제안이 들어왔다면 에픽하이가 부적 아닐까? 이번 이직도 마찬가지로 면접 끝나고 그 날이 가기도 전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 부적이 꽤 효과가 있는 걸까? 민간 신앙의 효과를 입증하기는 어렵겠지만, 공연을 통해 얻은 추억이 싱숭생숭한 시국을 돌파하는 데에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분명하다. 꿈의 절박함이나 황망한 상실감과 함께하는 음악을 만들어낸 이들이기에, 그 공감 덕분에 공연장에서 더 큰 에너지를 얻어갈 수 있었을 것 같다.
나처럼 공연장의 에픽하이가 주는 힘에 매료되어 매년 이들의 콘서트에 찾아오는 팬의 수가 원래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콘서트에 출석 도장을 찍을 팬이 부쩍 늘어나리라는 것을 2025년 에픽하이 콘서트를 보며 느꼈다. 그 힘을 받아 나도, 공연 오는 다른 팬들도, 에픽하이도 모두 한 해 행복하길 바란다. 한 해 잘 살고 연말에 다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