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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민 Sep 20. 2024

후유증

지나가버린 연휴와 떠나가버린 것에 대하여

5일간의 꿈같은 시간에서 깨어난 뒤, 나는 결국 앓아누웠다.


이번 명절연휴는 유난히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토일월화수. 5일간의 달콤했던 휴식은 재충전의 시간이었음에 분명한데, 왜 나는 지나버린 시간 때문에 앓아누웠는지. 꿈같았던 시간과 현실의 시차가 너무나도 컸던 탓일까. 꿈과 현실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고향과는 3시간 거리에 떨어진 타지에서 근무를 하고 있기에 이번 명절을 빌려 내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다녀왔다. 사람이 곧 고향이라 하지 않던가. 더운 가을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테라스가 있는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 걸쳤다. 평일과 주말엔 이직준비를 하고 있는 나였기에, 고향에 내려갈 여건이 되지 않아 명절같이 긴 연휴가 아니면 친구들 얼굴 보기조차 힘들다. 다들 잘 지냈는지 안부를 묻고, 서로 힘들다 죽겠다 신세한탄을 하며 웃으며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아직 우리가 덜 힘들구나. 다들 잘 살고 있구나 싶더라. 어디서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아도 본인 밥그릇 잘 챙기는 친구들이 있는 것도 큰 복이라 느꼈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을 뵈었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우리 강아지. 하이. 그리고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 제일 존경하는 아버지를 뵙고 나니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하던가. 그렇게 곱고 예쁘던 어머니의 얼굴에 핀 주름이, 머리를 뒤덮은 흰머리가 생각을 많아지게 만든다. 세상에서 제일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의 얼굴은 무언가에 쫓기는지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고 이제 내가 지금껏 받아온 사랑을 이자까지쳐서 되갚을 때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돌이 내려앉았다. 사실 이런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그간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나 보다.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아야 되는 게 무서웠으니까. 아직 나는 온전히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고향에서의 복잡 미묘한 시간을 보내고, 나는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기차에 몸을 맡겼다. 탑승 전, 혹시라도 두고 온 것들이 없는지 꼼꼼히 다시 한번 캐리어를 살피고, 어머니가 싸주신 명절음식은 잃어버리지 않게 한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다 휴게실 창가에 비친 나를 바라보니, 문득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고, 떠나간 것이 생각났다.


가족과 친구들은 나를 떠나지 않았지만, 사랑은 나를 예쁘게 빚어주고 떠났다. 고향에서 있었던 그녀와 추억이 문득 생각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고향엘 가는 그녀를 배웅했던 적도 있다. 그녀와 끝맺음을 할 때 했던 말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마지막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목소리를 크게 높여 싸웠고 '오늘 일 평생 후회하게 해 줄 거고, 절대 어디 가서 나 같은 남자 못 만날 거라고.' 소리쳤다. 실력에 비해 자존심이 쎈 타입이 나다. 그리고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 되었다. 대체 어디에서 나 같이 못해주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땐 잘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개차반이 따로 없더라.


사랑이 대체 무엇인지. 서른이 넘게 나이를 먹은 지금, 아직까지도 잘 모른다. 그녀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건 아니다. 단지, 그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해 주었고, 나의 모난 점들에 찔려가면서도 아프단 말 한마디 없이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로 날카로운 것들을 예쁘게 다듬어주었다. 진짜 바보같이.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나한테도 알려주지. 사랑을 잡는 법을 알려주었어야지.' 사랑을 그냥 퍼다 주니 건방지게도 그게 권리인 줄 알았다. 너에게는 약속시간에 늦어도, 옷을 대충 입고 나가도, 맘에 안 드는 게 있다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려도 괜찮은 줄 알았다. 사귀는 동안 이런 나의 모습에 얼마나 마음에 흉이 졌는지 마지막 순간엔 내가 불같이 화를 내고 소리를 쳤음에도 모든 걸 이내 내려놓은 듯 덤덤하게 이별을 고했다.


언제나 제일 느린 게 후회라는 말이 있다. 사랑을 잡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너를 놓치고 난 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술만 마시며 후회했던 지난날이 생각난다. 밤 기차를 타고 너와의 추억에 젖어 여러 터널을 지나다 보니 어느덧 내릴 때가 되었다. 하차역에 도착하여 기차의 문이 열리고 현실 속에 발을 내딛으니 '진짜 우리가 끝나긴 했구나' 실감이 났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우선 부모님의 반찬을 꽉 움켜쥐고 무사히 집으로 가야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돌아와 짐을 채 다 풀기도 전에 침대에 몸을 던졌다. 5일 만에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니 마음 한 편이 텅 빈 느낌이다. 혼자 있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던 나였는데 지금만큼은 적막과 쓸쓸함이 내 방 가득 메웠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그녀가 떠오르고 가라앉길 반복했다. 그리곤 이내 잠에 들었다.


이른 아침햇살을 맞아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식은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자기 전부터 몸에 이상 있음을 알아채긴 했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회사에는 오전만 쉬다 가겠다며 동료에게 휴가를 대신 올려달라 부탁하는 문자를 남기고, 몸을 일으켜 타이레놀을 집어삼킨 후 다시 침대에 누웠다. 왠지 모르게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지나가버린 연휴와 떠나가버린 사랑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모두 '꿈같은 시간'이었다는 것. 시작할 땐 끝이라는 시간이 오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끝이란 이내 곧 찾아오더라. 애석하게도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다시 발을 내디딘 나는, 너라는 '이상'과 너 없는 '현실'의 공백을 아직도 메꾸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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