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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민 Sep 19. 2024

당신의 삶의 이정표는 무엇입니까

삶의 기로에서 선 그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프랑스의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라고 한다.


Birth(태어남)과 Death(죽음) 사이의 인생은 Choice(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우리네 인생은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선택의 기로에 마주한다. 어떤 선택은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사소하기도 하고, 어떤 선택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을 만큼 중요하기도 하다.


가끔씩 어떤 날엔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서 가만히 누워만 있고 싶다거나, '누군가 나 대신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밥을 먹는 일도 귀찮고, 메뉴를 고르기는 더 귀찮고, 오늘은 무슨 옷을 입고 외출할까...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이 들다가도 선택하는 것 또한 자유의 일부분이고 지구상 모든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지는 고작 200년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이 드니, 그래도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는 건 아니다. 게으름 피우는 시간이 조금 단축되었을 뿐.


우리가 인생을 살며 선택을 할 때 제일 먼저 작용하는 것은 아마 '무의식'일 것이다. 생각보다도 빠르며, 습관처럼 반사적으로 나오는 본능과도 같은 것. 그것은 환경을 통하여 학습된 것일 수도 있고 예로부터 내 몸 안에 각인되어 내려온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본능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무의식 덕분에 우리는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와중에 그나마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자연스레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무의식'의 영역이 아닌 '의식'의 영역이다. 나의 선택에 의식의 작용이 개입되는 순간, 나는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혹시라도 이 선택으로 오늘 하루를 망치면 어떡하지? 그것도 아니면 내 인생이 뒤바뀌게 되면 어떡하지?' 뒤바뀌면 오히려 좋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온 관성이란 게 있기 때문에 두려운 건 어쩔 수없다. 이런 선택의 순간에 마주할 때면, 나는 가만히 고민을 하다 생각주머니에서 나를 꺼내어 본다. 과연 '나다움'이란 무엇일까.


당신의 이정표를 묻기 전, 나의 이정표를 먼저 소개하자면 '나다움'이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물음을 하루에 열 번씩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듯하다. 나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또 내가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고, 내가 어떤 이성에게 끌리는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등등 정말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생각의 집합들 속에서 작게나마 교집합이 보인다면 그건 '나'에 가깝다고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나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올 때, 걷고자 하는 길을 항상 '나다움'을 기준으로 골랐다. 예를 들면 나란 사람은 천성이 게을러터진 사람이기에 나를 극한의 환경으로 몰아넣지 않으면 변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의 '나다움'이란 의지력이 박하고,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정도라고 해석하면 좋겠다. 그래서 선택을 할 때, 'A'라는 길은 내 인생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포장된 길이고 반대로 'B'라는 길은 시작부터 가시밭길이고 고생길이 눈에 훤하다. 앞서가던 이들의 마른 핏자국도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그 길이 내 인생관을 확장시켜 줄 수 있는 길이라 판단되면, 손에 땀 한번 쥐어준 다음 한숨 한번 크게 쉬고 'B'를 향해 걸어갔다.


이런 '나다움'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다하면서 득이 없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선택지에서 조차 없는 길을 굳이 굳이 만들어 길을 걷기도 했다. 머리가 안 좋으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선조들의 지혜는 몇 수 앞을 내다보고 하신 말씀이더라. 하지만 이런 무모한 시도 끝에도 배움은 분명 존재했으며,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야는 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세상은 깊고 넓었으며, 나는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을 뿐이었다. 나 역시 오래 살았다면 오래 살아온 나이가 되었고, 젊다면 아직 젊은 나이기에 '나다움'의 초안은 완성되었지만 이런 내 모습을 보니 수정보완이 되어야 할 부분이 아직도 많다. 아마 평생을 고치며 살아야 할 수도 있다.


미국의 순수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의 마지막 구절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을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건 사실이지만 덜 지나간 길이 모든 사람에게 알맞은 길이라 말할 순 없다. 선택은 언제나 본인의 몫이다. 선택은 곧 자유이며, 자유를 행하려는 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자유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선택의 기로에 선 당신에게 나의 부족한 견해를 조금 얹자면, 인생이란 B와 D사이의 C이지만,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 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한 선택이 옳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정답으로 가꾸고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가지 않은 길'에서도 프로스트가 말해주듯,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 아쉬움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에서 느껴지는 후회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또 우리네 인생은 어떤 길을 가든 언젠가 분명히 선택의 기로에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땐 이미 시간이란 길을 지나오며 더 성숙해진 내가 있을 테니, 좀 더 현명하게 나에게 꼭 맞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길은 분명 존재하며,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선 당신에게도 묻고 싶은 게 있다.


당신의 삶의 이정표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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