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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Sep 13. 2020

16 8000km도 뛰어넘는 엄마의 텔레파시

덴마크에 온 지 일곱 달,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다


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뒤로 많은 것이 변했다. 먼저, 삶의 활기를 찾았다. 매주 월, 수, 금 고정된 스케줄이 생기니, 이제야 생산적인 삶을 사는  맛이 난다. 예전에는 ‘그 스케줄’이 강제적이냐, 자발적이냐에 따라 생산성이 좌우되곤 했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무언가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열심히 다녔다. 8월 14일 개강 이후 약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침 8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에도 꼬박꼬박 나갔다. (확진자 수가 급증했던 지난 수요일을 제외하고는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출석했다.) 어학원 친구의 도움으로 레스토랑 몇 군데에 이력서도 넣었고, 비자 종류를 비롯해 덴마크 체류 관련해 몰랐던 정보들도 많이 알게 됐다.


발음의 장벽에 무너질뻔 한 적도 있었지만..


쉬는 시간마다 영어로 대화하니 자신감도 생겼다. 매 쉬는 시간마다 좌절감도 찾아오긴 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 좌절감이 동기부여가 되어 영어 공부도 다시,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최소 11개국 친구들이 모여 수업을 들으니, 학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 됐다. 무엇보다 마음 맞는 친구들 몇몇 생겼다. 내가 새롭게 정착한 곳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기니, 이제야 덴마크에 나로서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한데 몸에서는 경고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새벽 6시 30분에 기상하는 것 외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될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토록 나약한 내 몸뚱이가 야속했다. 단순 증상이라고 하기엔 목 옆에 무엇인가가 부어오르고 만져지는 거 같아 병원에 예약했다.


가장 빨리 검진받을 수 있는 날은 역시 일주일 뒤. 우스갯소리로 일주일 기다리면 병이 저절로 낫는다고들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에 일주일 새 병이 더 커진 기분이었다. 벌어들이는 돈이 없어 세금을 내고 있지 않지만 무상 의료서비스를 받으니 기분이 또 새로웠다. 다행히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을 듣고 걱정을 내려놨다. 집에 도착해 그동안 손 놓고 있던 것들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길었던 한주의 끝. 어김없이 장을 보러 집을 나섰다. 자전거와 함께. 금요일 오후 4시에 자전거를 탄 적이 없지 않지만, 시에서 가장 큰 대학교 앞으로 이사 온 뒤 금요일 오후 4시에 자전거 타는 건 처음이었다. 퇴근길, 신호를 기다리는 대략 20대의 자전거를 보고 기겁을 했지만 자전거도 더 타기 편한 사이즈로 바꿨겠다, 용기를 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출발도 잘하고 꽁무니에 합류도 잘했다. 그런데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 좌회전 차선에서 합류하던 자전거가 내 옆으로 끼어들었다. 초보인 나는 눈치껏 가장 가생이에 붙어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핸들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다른 자전거 핸들이 짓누르고 있었다. 아픔은커녕 지금 여기서 넘어지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거 같았다. 사이클링 경주하듯 나를 밀어붙이는 자전거에 넘어지지 않으려 버텨야 된다는 생각에 핸들을 더 꽉 쥐었다. 몇 초 사이에 손은 퉁퉁 부어있었고 주머니에 넣고 출발했던 새 마스크도 사라져 있었다.


가장 서러웠던 순간 중 하나이니.. 기록용으로 찍었다


장 보러 나온 건데 오른손으로는 물건도 집을 수 없었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내가 너무 느리다는 소리에 쏘리쏘리 밖에 하지 못했던 자신이 비참했다. 지난 4월 셧다운 때 이후로 가장 큰 ‘현타’가 왔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손등에 얼음 팩을 올리고 멍하니 창밖만 봤다.


오늘 영상통화를 하는데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도 안 했는데. 역시 엄마는 말하지 않아도 귀신 같이 알아채는 걸까. 지난 7개월 동안 영상통화를 하면서 처음 본 엄마의 얼굴이었다. 허리를 삐끗했다는 엄마의 말에 뭐하다가 그랬는지, 괜찮은지, 파스는 붙였는지, 지난번에 올라온 손가락 습진은 많이 가라앉았는지 물어봤을 뿐인데. 엄마는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뱉더니 집에 오면 내가 좋아하는 메밀 전병도 해주고 도토리묵도 해줘야 되는데 하는 말만 반복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영상 통화할 때만큼은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일부러 더 장난을 쳤다. 그런 나를 보는 엄마의 눈이 빨개졌고 엄마의 눈을 본 나는 울임이 터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빠의 장난 섞인 목소리로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내일 또 통화하자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집에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에 언니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지난 목요일 이슬아 작가의 실시간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출판사를 부모님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저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쉽지 않은 길을 가는 모습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 ‘효’를 강조할 때마다, 그 부담감에 숨이 막힐 때마다, 부모님 인생은 부모님 몫이고 내 인생은 내 몫이라며 스스로를 세뇌시키곤 했는데. 해외에 떨어져 살다 보니 이제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인다. 살기 바빠, 눈에 띄지 않게 저 깊은 곳에 꾹꾹 눌러놨던 것들이 수면 위로 하나 둘 떠오른다.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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