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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Jun 08. 2021

덴마크에서 먹은 은혜로운 바비큐


주말에 1박 2일로 근교 여행을 다녀왔다.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또 버스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바다가 보이는 에어비앤비라 예약했는데, 사진보다 훨씬 더 황홀했다. 여행의 목적은 딱히 없었다. 그저 주말에 비가 안 와서 떠난 여행이었다. 어쩌다 보니 비자 발급 기념 여행이 되었지만. 무튼, 그래도 이왕이면 여행을 왔으니 야외에서 바비큐를 해 먹으면 좋겠다는 얘기는 했다.


사실 머릿속은 온통 바비큐 생각뿐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요트를 정박하는 항구가 보였고 곳곳에 벤치도 있었다. 딱 바비큐 해 먹기 좋은 벤치. 같이 사는 사람은 여기가 좋겠다고 했지만 요트 근처인지라 불안했다. 내 반응을 본 그는 여기는 덴마크다, 어디서든 노상 바비큐가 가능하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며 우선 일회용 그릴부터 찾아 나서자고 했다.


황홀한 숙소에서 바라본 그림 같은 풍경


바닷가에서 시내 중심지까진 걸어서 20분. 20분을 걸어가니 마트 네 개가 몰려있었다. 이미 2만 보 가까이 걸은 탓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지만 바비큐 먹을 생각 하나로 눈에 불을 켜고 그릴을 찾아 나섰다. 희귀템이라 역시 쉽게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마트에 다다른 우리는 그냥 빵이나 먹자며 발길을 돌리던 찰나 카운터 뒤에 수줍게 쌓여있는 그릴을 발견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 그 자체였다. 그릴을 손에 쥔 우리는 위풍당당한 기세로 집게, 가위, 고기, 소금, 후추 그리고 맥주를 사들고 나왔다. 갑자기 다리가 덜 아픈 기분이었다.


다시 20분을 걸어 항구 근처로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트 근처에서 불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연기가 솟구치고 재까지 날리는 이 행위를 한다는 건 영 아니었다. 의견이 팽팽해지자 현지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요트 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물어봤지만 반응이 애매했다. 와이낫? 이 나와야 되는데 조심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결국 손에 쥔 그릴과 자리


그렇게 마트 봉다리를 들고 바닷가 근처를 배회하다가 한 아저씨를 만났다. 쾌남 아저씨는 우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하시더니 자기가 근처에 괜찮은 곳이 생각났다며 차에 타라고 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걸어갈 테니 길만 알려달라고 했다. 알아들을 리가 없던 우리는 결국 차에 올라탔다. 아저씨는 고맙게도 자신의 팔뚝에서 손가락을 갖다 대며 자신은 백신을 맞은 사람이고, 아내 심부름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내리고 보니 우리가 이미 다녀간 써머하우스 촌이었다. 여기 또한 20분을 넘게 걸어왔던 덴데 차 타고 1분도 안 걸려서 또 오게 됐다. 장보기 전 구글맵에 바비큐 그릴장을 검색해 찾아갔었는데 여름 별장이 주욱 늘어진 곳에 위치한 프라이빗 그릴장이었다. 여긴 아니다 싶어 미련 없이 돌아섰던 곳이었다. 1, 2만 원만 추가하면 그릴에 숯에 집게, 가위까지 준비해주는 한국 펜션이 서글프게 그리웠다.


우리를 서글프게 만든 개인 별장과 요트들


우리에겐 아직 생생한 고기가 있으니 포기하지 않고 아저씨가 알려준 넓은 들판을 찾아 나섰다. 별장 반대쪽으로 걸어가니 정말 강아지들이 뛰어놀기 딱 좋은 탁 트인 잔디밭이 있었다. 요트 주차장보다는 여기가 나은 것 같으니 뙤약볕에 고기가 상하기 전에 여기로 정착하는 게 어떻겠냐 물었다. 같이 사는 사람의 표정은 탐탁지 않았다.


마침 저 멀리 한 할아버지가 가게 문을 닫고 있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한테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먹을지 말지 정하는 걸로 합의했다. 나보다 바비큐가 더 간절했던 같이 사는 사람은 한 손엔 마트 봉다리를 들고 익스큐즈미를 외치며 달렸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요트를 대여해 주는(것 같아 보이는) 상점의 주인이셨고 마침 그 상점 마당엔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요트가 없는 바다와 바비큐 하기 딱 좋은 벤치가 펼쳐져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양손에 장바구니를 든 외국인 청춘 남녀를 본 할아버지는 자신의 벤치를 써도 좋다고 말했다. 우리가 어쩔 줄 몰라하자 베리 베리 웰컴이라는 말을 남기시고는 자전거를 타고 쿨하게 떠나셨다.


저 뷰를 보며 고기를 먹었으니 맛없없


배불리 고기를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처음 본 외국인에게 흔쾌히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고는 자전거를 타고 홀연히 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에 편견 없이 베풀고는 자전거 타고 쿨하게 떠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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