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나는 꽤 뻔뻔한 비건지향인이다.
내 기세를 보고 사람들은 내 식단의 90% 이상이 채식인 줄 알고 텀블러도 썩 잘 챙기는 것으로 보아 일상의 많은 부분을 비건과 잘 꿰고 있는 줄 안다. 음.. 미안하지만 아니다. 난 여전히 '노력형' 비건'지향'인일 뿐이다.
생각보다 많은 날 비건을 실패하고 그럼에도 또 다시 비건을 다짐하며 작심삼일스러운 생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철칙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라는, 어설프게 육식과 편리함 앞에 무너지는 핑계는 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쩔 수 있는 최대한을 생각한다. 덩어리 고기만이라도 피한다든지, 한끼 채식만큼은 필수적으로 고수한다든지, 물품을 구매하고 싶다면 중고 시장에서 먼저 알아본다든지 등.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물러서기 시작하면 오랜 습관에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리고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란 자괴감도 크고, 의지를 불태우기도 어렵다.
스스로에게 '절대'라는 어떤 조건이 점점 강화되어야 하는 것이 비건의 삶이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와 목표가 명확하기 때문에 생각하시는 것만큼 괴로운 과정은 아니다. 혹시 괴롭고 힘들다고 느끼는 비건이 있다면 지속적으로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거나 목표가 정확히 서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시길 바란다.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도 아주 조금씩 천천히 높여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날 예상할 수 없이 비건을 실패하더라도 그다지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일주일 또는 한 달이란 기간을 두고 봤을 때 내가 비건에 성공하는 비율은 유지되고 있거나 소수점 단위로라도 점차 늘어가고 있다는 데에 확신이 있다. 물론 이건 지속해온 기간에서 나오는 힘이기도 한다. 비건지향을 해온지도 어느새 2년이 가까워 오는데, 당연히 1년이 안 되었을 때는 나 역시도 실패하는 순간 순간들을 곱씹고 좌절하곤 했다. 육식의 습관이 남아서 육식단을 보면 두눈을 질끈 감거나 논비건 친구들에게 괜히 툴툴대곤 했고, 그러다 손쉽게 타협을 해놓고는 실패한 날들을 셈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향성만 잘 정하면 하나 하나의 사건들이 얼마나 의미를 가지겠나 싶은 생각이 점차 들었다. 완벽한 비건 실천의 기록이 쌓이면 지구와 환경에 더 큰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 수행할 프로젝트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숨에 자잘한 것까지 완벽히 해내려는 일은 숨통을 조이다 되려 긴장을 놓아버리게 할 수 있다. 어차피 나는 매일, 매순간 비건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수많은 선택에서 결정을 이끄는 핵심 요소이자 우선순위는 비건이다. 그렇다면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비건의 실패를 지나치게 자책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타의(他意)적인 실패에 무덤덤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내 의지나 의견은 한 방울도 들어있지 않은 실패는 꽤 불편하다.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친구가 마음대로 정해 데려간 식당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없어 당황했던 일. 만나자마자 말 없이 자신 있게 데려갈 때부터 불안했는데, 워낙 생소한 동네라 '계획이 있겠거니' 마음 한편에서 믿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름 사전 조사라고 내게 비건식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었는데 그때만 해도 단순히 비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묻는 질문이라 생각했었고, 대개가 그러하듯 '잘 모르겠다'며 쩔쩔매기에 곧 있을 만남에서 식당이나 메뉴를 선정할 때는 다시 의견을 구할 거라고 넘겨짚었던 것 같다. 사전 조사였던 그 대화에서 '부득이한 경우에는 먹으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말해준 것이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식당을 정할 때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인 나와 그 친구 사이에 간극이 있었던 걸까.
이해해보려 해도 식사를 하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이런 저런 요소를 제외해도 결국 동물성 성분이 포함되고야 마는 메뉴들 앞에 무력해졌고, 산골 같은 동네에 덩그러니 놓인 식당의 위치도 괜스레 원망스러워졌다. 사실은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모처럼 유해하고 유혹적인 맛을 즐기니 내심 즐거웠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죄송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 몸에서 조금이라도 그런 성분을 그리워하거나 당겨서 먹은 게 아니고, 마치 누군가 억지로 입안에 욱여넣듯 먹어야 하는 이런 상황은 도리어 입안이 쓰고 무슨 맛인지 느낄 수가 없다.(체력이 많이 떨어지는 날에는 나도 이따금 동물성 성분이 끌리는 날이 있다.) 무엇보다 먹기로 각오가 되어 있는 날이 아니었다. 각오할 틈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게 옳겠다. 그러니 입안은 더욱 까끌해졌다.
물론 나는 애주가이기 때문에, 비건식을 포기하는 순간이 여전히 많다. 집에서 마실 때야 내가 안주를 꾸리면 되니 문제가 없다. 하지만 친구, 지인 들과 술집을 찾아야 할 때는 주종이나 가격, 위치 등 고려할 요소도 많은 판국에, 비건 옵션 여부까지 고려하면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술집의 메뉴는 주로 '고기'이지 않던가. 술의 용도가 동물성 지방으로 느글느글해진 속을 달래는 것인양. 때문에 그럴 땐 한 걸음 물러선다.(그럼에도 이때도 '최대한'을 생각해, 덩어리 고기는 먹지 않는다. 대체로 치즈나 소스 정도에 양보한다.) 그리고 그건 충분히 검색을 하고 지인들과 논의 끝에 다다른 결론이므로 어느 정도 '각오'를 하는 셈이 된다. 부득이한 경우란 '최대한' 노력을 했으나 방법을 강구할 수 없을 때 맞닥뜨리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더 많이 알아봐도 괜찮다.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가 노력할 시간을 주는 것, 내 제안을 참작해주는 것뿐이다. 그래야 나도 논비건인 당신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다.
비건이 먼저 배려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결정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는 타인의 의견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심지어 나는 중식당에 가서 단무지에 식초를 뿌리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배려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타인의 눈치를 살피고, 의견을 묻는 일이 '배려'라는 것을 나는 이때 제대로 배웠다. 대중적인 선택이 반드시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선택과 동일하리라 보는 것이 '독선'이자 '오만'이라는 점도. 그렇다면 신념이 다른 상대와 함께할 때는 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무슬림이나 불심이 깊은 이들에게 육식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까 비건이 아직 보편적이지 않다고 하여, 그래서 관련 정보를 알아보기 어렵다고 하여 육식 환경(비친환경적인 공간)으로 당연하게 이끌고 가는 것은 내게는 무시고 폭력이다.
혹시 일부 사람들이 비건을 단편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비건은 물론 동물권 보호에서 시작됐지만 현재 가장 지지를 얻고 있는 이유는 '환경 보호', 즉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이다. 그래서 내 지인들이 나와 함께할 때 기꺼이 '채식 한끼'에 동참할 수 있는 것도 이로 인해 '환경 보호'에 참여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덕분이다. 무언가(고기)를 포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 있는 무언가(환경 보호 실천)에 동참하는 시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가장 듣기 괴로워하는 말이 '나는 못해'다.('안해'라고 말하며 벽을 치는 사람은 실상 거리를 두면 그만이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넘기는 사람이라고밖에 느낄 수 없으므로 그런 사람은 가까이 두지 않는 게 내 삶에 이롭다.) 일이나 공부에 있어서는 '못한다'고 말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격려가 즉각적으로 나오는 시대에 살면서, 채식 앞에서는 쉽게 놓아버리는 태도가 못내 아쉽다. 또한 나와의 한끼로 어렵지 않게 환경 보호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도 이를 외면하는 것(내 의견을 묻지도 않는 것)은 그저 의지가 없다고 느껴져 실망스럽기도 하다.
비건이 상전은 아니다. 고매한 존재도 아니다. 그러므로 대우해달라는 말도 당연 아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필요한 방향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니 피하고 외면하지 말고 정면 대응하길 바라는 것뿐이며, 대면하지 않는 방법이 과연 진정한 존중인지에 대해 고민해주길 바란다.
다행히 앞선 친구와는 잘 얘기하고 풀었다. 대화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 친구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고 마음을 조금 더 유연하게 쓸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다. 더 좋은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논비건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정말 비건이라는 어쩌면 새로운, 그리고 떠오르는 이 흐름을 무의식적으로 혐오하지 않고 함께 '잘' 살아갈 방법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