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이 '나만의 동굴'보다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의 비중을 늘린 이유
나는 예민하다. 일반적인 수준보다 훨씬 예민한 편이다. 이 사실을 긍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이 예민함에 대해 말할 때 종종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기 때문에, 잘못된 점이라고 착각했었다. 하나의 특성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 김하나 작가와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삽니다>를 읽고 난 후부터였다. 두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살아갈 때와 여성 두 명이 살아갈 때의 차이점뿐만 아니라 객체로서 사람 간의 차이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서술한다. 결국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핵심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다른 점을 인지하고 있는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율해나갈 것인가. 성별의 문제가 아니고 다른 객체를 수용하는 방법과 융화하려는 의지의 문제다. 꽤 잘 어우러져 살아가는 두 사람은 기대보다 많이 다르다. 황선우 작가는 성향상의 이유든, 업무상의 이유로든 필요한 대로 사들이고 쌓아두는 타입이라면 김하나 작가는 청소의 달인이자 정리의 신이다. 그런가 하면 황선우 작가는 신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에너지를 창출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편이라면, 김하나 작가는 숙취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색가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감이 갔던 차이는 황선우 작가는 누적된 회사생활에 영향을 받아 일반 사무실과 같이 잡음도 살짝 있고, 긴장과 열기가 은근하게 감도는 환경에서 집중력이 발휘된다면, 김하나 작가는 사람 한 명이 곁을 지나기만 해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사람이다. 나는 당연 후자다. 현재 회사로 이직하고 심신이 훨씬 안정된 데에도 절간 같은 분위기가 한몫한다. 여전히 사람들의 움직임, 발소리, 통화 목소리 하나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지만 데시벨 기준이 낮은 곳에서의 소음은 그만큼 작기 때문에 피로도 적다. 여하튼 내겐 그저 존경스럽기만 한 작가님도 예민한 구석이 있지만 근사한 미소를 짓고, 주의 깊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강연이나 방송도 차분히 진행하는 것을 보니 예민함이 극복되지 못할 종특이 아닌 잘 가꾸어 활용하면 되는 요소로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예민한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관계를 어려워 한다. 상대적으로 소소한 말과 행동에 타격이 크고, 그렇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신경을 기울여 이해하려거나 반응해야 한다는 점에 피로를 느낀다. 그래서 보통은 관계의 확장이나 유지를 포기하고 집으로, 방으로 돌아와 저 홀로 보내는 시간을 점차 늘려간다. 이를 두고 넓은 범주에서는 집순이라 하고, 조금 좁혀서는 내향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계 안에서 에너지를 찾기보다 소모하는 편이며, 에너지를 보존하려는 생존본능 하에 자극이 적거나 없는 '집'으로 피신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극도로 불안하고 나약해졌을 때는 모든 교류를 중단하고 집으로, 방으로,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예민함이 극에 달했을 때는 분명 그것이 도움이 된다. 자칫 잘못하면 의도치않게 갈등을 빚거나 상흔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내부에 남은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해 복구에 힘써야 한다. 그건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다. 나 자신이 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같은 방식을 고수하는 게 맞을까? 그렇게 정체되는 것이 정말 자신이 원하는 바인가? 갇혀 지내기만 하면 회복되었는지는(또는 단단해졌는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지? 이런 생각들이 나를 조금씩 세상을 향해 등떠밀었다.
관계를 피하는 게 당장은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다치지 않을 수 있고, 피로도 적을 테니까. 물론 적당한 휴식과 도피는 여유를 되찾고 주어진 상황을 폭넓게 이해할 기회를 마련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유효한 셈이다. 그러나 피신이 일상화되기 시작하면 삶은 점차 힘을 잃은 듯 부실해진다. 관계에서 부자연스러워지고 사회 안에서 부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목표나 꿈이라는 것들은 어떻게 이루지? 사회라는 관계망이 형성된 구조에서 발전은 사람과의 교류 없이는 찾아오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도리어 사람들과 잘 지내기로 결심했다. 불쾌한 처사마저 모두 참겠다거나 묵인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혹시 사람 그 자체가 아닌 수많은 부침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면 부침을 줄이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 오만, 치기, 고집, 지나친 자존심, 불안의 표현 등에서 비롯된 부침을 먼저 줄여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사람들은 그때 걸러내면 된다.
이 방법은 실로 효과가 있었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은 거울 같은 법이라 내 태도를 바꾸자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었고, 점차 자주 어울리는 사람들의 유형도 달라졌다. 더 밝고, 따듯한 사람들, 때로는 더 단단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이 내게 다가섰고, 나 역시 자석처럼 그들에게 이끌렸다. 삶이 긍정의 기운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트레스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진심어린 응원, 안온한 배려, 기운찬 믿음이 흘러넘치는 환경에서 신경이 곤두설 리 없었다. 교류로 인해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감정의 파도가 적어지자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사회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여전히 혼자이고 고요한 상태에서 비로소 휴식을 취하긴 하지만 한걸음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용기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충전됐다.
물론 나는 내가 외로움을 탄다는 점도 잘 인지하고 있다. 또한 생각보다 사람들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니 남들보다 사회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끝내는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겠다 결정할 수 있었으리라. 온기와 대화가 필요하다면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당연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성취욕이 높은 사람이다. 한 자리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성향이며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가 솟구치던 참이었다. 경쟁 속에서 내 능력을 증명하며 사람들과 공격적인 관계를 맺고, 집으로 돌아와 고독에 잠겼던 과거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고, 다른 시도가 필요했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수용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원하면서도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교정해야 할지 깨닫고 이행해본 것뿐이다. 우리 정신은 힘든 일은 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게으른 게 아니라 손상을 막으려고 자기방어본능이 잔뜩 곧추서는 것이다. 그러한 본능을 이겨내고 나아가는 사람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을 끌어낼 생각은 없다. 내 생각이 정답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피하기만 해서는 문제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방법을 찾아나서야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나날이 유연해질 수 있다. 우리는 충분히 제련되고 단련될 수 있는 원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또한 사람이라는 자극이 항상 상처만 내는 것도 아니다. 단조로운 삶에 자극은, 때로 빛이 되어 스며들기도 한다. 그 사실을 더욱 강렬하게 믿을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고, 인생의 이면을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