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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a Han Mar 28. 2019

여행의 시작

2003.12

영양가 없이 일요일도 부족하게 바쁜 회사생활과 일상을 보내던 내게, 여행이 웬 말이었던가.

대한민국의 직장인의 휴가란 것이 쓰라고 있는 휴가인지, 없어지라고 있는 휴가인지 구별이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지만, 얼마간 휴지기를 갖고 직장을 옮긴 2003년 그해, 연말이 다가올 무렵, 휴가 미소진 시 소멸이라는 메일을 받았다.  

이왕이면 한방 소진을 목표로 해보니, 그나마 적당해 보이는 것이 여행.

그렇게 내 여행의 시작은 정말이지 지극히 단순한 이유로 시작됬다.


그런데 12월도 지나 몇일 남지도 않은 한겨울에 어딜 갈까?

급하게 생각하려니 떠오르는 곳도 없었지만, 평소 세계 음악을 종종 즐겨 들으며 상상 속으로만 여행을 했던 나는, 클라우디오 발리오니의 나라 이탈리아를 찜하게 된다.

딱히 유럽을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유럽이 되어 버린 경우.


떠나기 딱 2주 전에 이탈리아만 일주일 가량 여행하는 호텔팩이란 걸 구매해 봤는데, 일정 중에 이박만 호텔을 예약하면 마음대로 여행을 계획해서 할 수 있는 자유 여행 상품이었다.

첫 해외여행이었던지라 심심하게 가는 게 내키지 않아 구매한 사이트에서 동행자 찾기를 신청해 보았으나,

결국 인연이 닿지 않아, 밀라노로 입국해 로마에서 출국하는 일정으로 혼자 떠나게 된다.


처음 여행이다 보니, 호텔 같은 건 됐고, 여행하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정보도 얻고 싶어 결제까지 한 호텔도 귀찮아서 이박 중 일박만 호텔서 하고 남은 일박은 돈 내고도 안 가버린 채, 별도의 돈을 써서 한인 민박집을 이용해 봤다.


그렇게 숙박 집과 거리에서 여행자들을 만났고,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하는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시간이 허하는 만큼 부지런히 챙겨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싱거운 음식을 즐겨먹는 내게 음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음식들은 다소 짜서 즐기기엔 쉽지 않았고  추운 한겨울에 파업이 잦은 나라였기에 제대로 생고생을 하기도 하여 첫 여행의 기억이 그리 좋은것만은 아니었다.


사람 사는 곳, 그게 그거지... 이 먼 곳까지 와서 왜 이고생일까 싶어 여행을 하고 있는 이유조차 제대로 찾지 못했기에 다음엔 이런 고생하지 말자 싶었지만,  썰렁했던 그 여행이 나의 호기심과 다른 여행들의 시작이었을 줄 이야.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던가?

여행 때마다 그것이 아마도 마지막 여행일 것이라 생각하며 여행을 해왔건만 호기심 발산을 위해 일 년에 열흘 안팎으로 직장인 단기 여행을 해온 것이 어쩌다 보니 15년이 넘게 되어 버렸다.

 

언젠가부터는 마지막 여행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마지막 여행의 순간이 오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날이 가능한 내 인생의 마지막 부분이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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