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된 이기심

6. 종교적 신과 인간의 지배에 대해서

by 예나

나는 나의 첫 살생을 기억한다. 비 오는 날 놀러 간 계곡에서 달팽이를 한 마리 주워 펜션으로 데려왔는데 실수로 밟은 것이다. 산산조각 난 껍질을 달고 천천히 숨을 곳을 찾으며 죽어가던 달팽이의 무력한 모습에 얼마나 죄책감이 컸는지 이를 바라보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전에도 생명이 죽는 소리는 나에게 익숙했다. 사실 아이들은 매일 생명이 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집안으로 찾아온 파리, 날파리, 거미 등이 귀찮고 불편하다고 죽이는 당신들이 내는 소리들을 듣는 것이다. 길거리나 도로에서 인공 빛이 곤충들에게 공해가 되어 타닥타닥 죽는 소리들도 그렇다. 달팽이의 죽음에 울었던 이유는 죽인 행위의 감각이 내 발끝에 선명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에는 벌레들도 많이 사라졌는지 밤거리를 걸어도 이전과 같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무거운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침묵의 소리는 생물종 다양성이 사라져 가는 소리다. 아직도 부모와 함께 곤충채집을 나가거나 곤충을 구매해서 작은 케이지에 가둬 기르는 아이들이 많다. 집 앞 산책 중 곤충이 기어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며 공부하는 것보다 작은 케이지에 가둔 곤충을 지배하며, 철장 안에 비자연적으로 수감된 동물들을 보며 소위 '자연'을 배우는 아이들.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정말 자연인가?




생명의 나무에서 하나의 작은 가지로 뻗어 나온 호모 사피엔스의 시작을 보자. 인류는 시작부터 피가 흥건한 길을 걸었다. 인간은 언어와 도구의 사용, 불의 지배와 같은 것들의 도움으로 급격하게 진화한 탓에 순식간에 생태계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 겨우 25만 년 만에 45억 년 역사의 지구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쥐고 말았다. 이 좁은 모서리에서 지금 우리는 발도 제대로 못 펴고 불안하게 서있다. 본성이 포악하여 피의 역사를 걸어왔는데, 너무 무분별하게 지구를 착취하다 보니 이제는 나무를 잘라도 인간이 위험, 분리수거 안 해도 인간이 위험, 배달음식 먹어도 인간이 위험, 이메일 정리를 소홀히 해도 인간이 위험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인류 전체가 내일 사라져도 지구 생태계는 말짱하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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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단순한 소통을 넘어 이야기를 위해 언어를 진화시켰다. 인간의 언어는 놀라울 만큼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다. 이들은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나누고 믿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런 것들은 한 인간 집단의 힘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화합하는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대부분의 신체적 성질이 열등함에도 자신보다 크고 강한 생물을 멸종시킬 만큼 효과적으로 무자비한 사냥을 했다. 하지만 오래전 인간은 직접 생명을 죽여 멸종시키는 것을 졸업했다. 요즘 인간이 행하는 살생과 멸종은 투명망토를 입은 듯 은근히 모습을 감췄다. 내 생각에 환경파괴는 비효율성과 비생산성을 악으로 보는 가치가 스며든 사회로부터 나온다. 극도의 효율을 자랑하는 도시에서 살며 나는 이제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종 다양성 파괴에 효과적으로 한 몫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습관적으로 배달음식을 시키고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이렇게 환경파괴 과정이 시스템화 완료된 산업 안으로 들어가면서 모습을 감추니 인간은 그에 대한 감각을 거의 완전히 잃었다.


사진과 영상으로 봤을 뿐이지 나는 바닷속 쓰레기를 직접 본 경험이 아직 없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흔히 먹는 동물을 한 번이라도 직접 죽여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저녁 식탁에 고기를 올리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그 과정 속에서 죽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 생명을 죽여 내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과정을 온전히 경험하여 내 앞의 음식의 귀중함과 그 의미를 느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업이 커지면서 개인 소비자는 죽는 생명과 환경 파괴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으로부터 멀어진다. 소비자가 산업을 키우고 소비자가 눈 감을 수 있기 때문에 산업과 산업 관계자들도 결국 죄책감과 책임감으로부터 똑같이 멀어진다. 축산업, 낙농업은 하나의 예일뿐이다. 생명이 죽는 소리는 이제 달팽이의 껍질이 발에 밟혀 깨지거나 벌레가 인공 불빛에 타닥타닥 타 죽는 소리가 아니다. 전염병으로 수십 수백만의 동물들이 생매장된다는 뉴스 소리, 그 뉴스 바로 다음 예능에서 "치느님" 농담으로 웃는 패널들의 소리, 쓸데없이 동물 가루가 들어간 과자를 뜯는 소리, 배달음식 포장을 벗기는 소리, 불필요한 물건을 주문하는 소리, 화이트 노이즈가 필요해서 틀어놓은 보지 않는 TV 소리, 카페에서 플라스틱 빨대 하나 얼른 금지시키고는 환경을 위해 큰 일을 했다 생각하는 착각의 소리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소리는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다.


솔직히 이런 사진만으로는 개인에게 분노의 크기만큼 큰 자책감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리고 카페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금지해도 우리는 매일 비닐과 플라스틱을 쓴다.


기독교 신은 인간에게 그의 창조물(자연) 관리를 의뢰한 듯 보인다. 기독교 철학은 살짝 공부해봤을 뿐이지만 신자나 사제들의 개인적 의견은 접어두고 원론적 철학에 집중해본다면 분명 인간은 신이 창조한 작품을 유지, 향상, 강화, 지속, 보호해야 하고 이는 인간의 이익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다. 사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응당 인간으로서 기억해야 하는 역할을 적어놓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연의 한 조각일 뿐이지만 유별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와 상관없이 인간은 이전부터 많은 종을 멸종시켰는데 이를 멈출 수 있는 좋은 윤리적 가르침이었을 수도 있다. 문장 그대로의 순수함을 믿어준다면 인간들 마음대로 지배하고 장악하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의 말'만 잘 들었다면 어쩌면 괜찮았을 것이다.


문제는 과학처럼 종교 또한 인간 특유의 것이라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기독교의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보통은 반대로 이야기 하지만) 의인화된 신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정말로 인간은 황당하게도 우주를 창조한 신이 인간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뻔뻔함을 교묘하게 숨기기 위해 "신이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여 신의 모습과 같이 만들었다"는 변명까지 만들어내며 인간의 위치를 '만물의 영장'으로 올렸다. 인간이 말하는 신은 우리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운명을 소유한다. 의인화된 신은 자연을 관리하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신은 소유하고 지배한다. 이런 지배의 개념이 없다고 거부하려는 사제를 만난 적도 있는데, 기독교 철학과 성경을 배운 입장에서 어떻게 그런 주장이 가능한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사람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묻는 나에게 답을 주진 못했다. "그냥 없어요, 알겠죠?"라고 공격적으로 말했을 뿐.) 인간과 신은 서로 닮은 탓에, 혹은 닮았다고 인간이 믿어버린 탓에, 인간은 서서히 신이 맡긴 임무 이외의 것들을 하며 자연을 훼손했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아무래도 이 짓을 신이 인간에게만은 허락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사실 어디까지 괜찮은지에 대한 선을 신이 제대로 긋지 않은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절대 진리'보편적이고 포괄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섬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인간은 그래서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은 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종교를 이용해 자신의 잔인함과 이기심을 미화했다.



신의 모습을 한 인간이 이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인정할지라도 종교가 인간을 특별한 위치로 올려놓은 사실을 거부하긴 어렵다. 종교가 인류와 함께 탄생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방법으로 인류에게 더 큰 힘을 주었다. 즉, 첫째, 같은 이야기를 하고 믿음으로써 인간 집단을 결속시켜서 연약한 개개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둘째로 전지전능하고 높은 위치의 신과 인간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며 스스로를 다른 동물과 다른 위치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극한의 생산성 추구라는 악의 옷을 입은 산업화는 진작 효율적 편의의 선을 지나갔다. 그 후부터는 결국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선택과 집중의 연속일 뿐이다. 자연과 환경이 파괴되고 생태계 다양성이 무가치한 개념이 되어가는 것을 우리는 별생각 없이 용인하였다. 이는 종교가 인간의 이기심을 진작에 미화시켰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누군가 그럴듯한 말로 이 명백해 보이는 역사를 반박해주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런 '지배'의 개념과 함께하는 종교를 사과와 반성 없이 내버려 두는 태도에 나는 소름이 끼치기 때문이다. 가장 약한 인간에게도 시선을 주었지만 세밀한 설명서 없이 그들에게 자연과 동물을 맡겨버린 종교의 신. 종교를 이용해서 '신을 닮은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에 대한 지배 권한'을 은근슬쩍 합리화한 인간. 우리는 미화된 인류의 잔인함과 이기심을 냉정한 눈으로 되돌아보고 우리가 마주한 위기에 대한 의견을 일치하여 옳은 방향으로 함께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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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낙관적일 수밖에 없다. 허무주의에 빠져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허무주의적 태도는 파멸을 수수방관하는 것 밖에 되지 않으며 결국 인간 지성의 힘을 믿는 낙관주의자가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생존에 위협이 될 정도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인류는 부랴부랴 기후위기와 환경파괴에 대처할 다양한 시스템과 규율과 기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시작은 했다. 예를 들면 회사는 이제 탄소 배출을 하려면 탄소 배출권을 구매해야 하고, 또 ESG는 투자자가 회사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기업은 이제 인기도 없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드디어 기후위기와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결정과 투자가 경제적으로도 솔깃한 제안이 되는 시기가 왔다. 불길 속 잘 보이지도 않는 은빛 실과 같은 희망이긴 하지만 나는 눈에 뻔한 새드엔딩이 너무 무섭고 마음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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