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초상화

5. 현대 사회 속 종교의 올바른 작용에 대하여, 과학이 나에게 주는 것

by 예나

아, 진짜 황당한 경우다.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학생 중 한 명이 기독교 학교를 다니는지 기본적인 과학 교육이 전혀 안되어있다. 진화생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혀. 없고, 지구에선 공룡과 인간이 같이 살았으며, 노아의 방주로 공룡을 제외한 동물만 살아남았고 공룡은 모두 멸종했다고 한다. 생명의 기원을 아직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나의 말에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은 후 생명을 만드신 건데 무슨 소리냐며 어리둥절해한다. 뱀은 인간을 유혹한 악으로 이해한다. 진화에는 중간 단계 화석이 없어서 사실이 아니라며 한참 뒤처진 괴상한 반박 논리를 펴낸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배우는 과학에 이렇게 큰 오류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성경에는 오류가 1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무조건 사실이라고 믿는 이 아이를 그냥 두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올바른 정보를 주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부모라면, 선생이라면 어떻게 이런 교육이 죄 없는 아이들을 기본 상식에서 멀어지게 그냥 둘 수 있는 걸까? 그날 나는 "과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신을 믿을 수 있고 신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만이 진리라 믿는 바람에 모든 과학을 배척하는 것은 절대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 정도로 대화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부모는 아이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자라는 것이 좋다고 결론을 내린 듯싶은데 내가 간섭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유사과학, 사이비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든다. 답답하다. 남의 아이 교육에 대해 간섭하는 것이 두려워 그에 대한 토론을 이어나갈 수 없다면 이 아이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매우 피곤해질 것 같다.




종교와 과학은 무지가 아닌 완고함만을 비난한다는 데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종교가 비난하는 완고함은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만을 말하는 것 같다. 과학이 비난하는 완고함은 모든 것에 대한 집착과 고집을 말한다. 이는 오류와 잘못된 이해를 인정하고 바로잡아나가며 이루는 발전을 막기 때문이다. 모든 과학 분야에 자리 잡은 시스템 자체가 그런 모습이기 때문에 과학은 수백 년 동안 엄청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기독교에선 획기적인 강연이라며 선형적 진화론을 일부 받아들이고, 이미 오래전 작은 공룡의 것임이 밝혀진 발자국을 인간의 것이라 주장하며 공룡과 인간의 동시대 공존을 가르치는 세미나를 열고 있다. 나는 질문할 것이 많았지만 그 교수라는 사람과 대화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확실히 종교는 자정으로 발전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현대에서 종교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선 당연히 과학이 열심히 일해서 제공한 세상 이해의 기본적 틀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집에서 매일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고 핸드폰으로 업무를 해결하면서도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니 그 터무니없는 모순에 힘이 약해질 수밖에. 정말 종교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왜 어려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과학이 무지를 비난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무지에 대한 태도에서 둘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무지에 대한 답을 주려고 하며, 과학은 무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 자체다. 과학 이전, 경전이 왜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한 조각도 없던 시기에 답이라고 적어놓은 것들은 인간의 상상력을 보기에는 충분했을지 모르나 옳은 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신의 말씀이며 답이라고 적어놓았는 걸? 고집이 세고 두려운 인간은 오류를 인정할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토론에서 지는 것, 나의 의견을 바꾸는 것은 성숙한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누군가는 성경에서 오류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는 이유는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성경을 현대 사회의 시각과 가치관에 맞춰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절대 진리가 어떻게 시대상을 반영할 수 있겠는가? 말이 되지 않는다. 수천, 수만, 수억 년 전에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았고 자전하며 매일 태양빛으로 지구의 한 면을 돌아가며 따뜻하게 밝혀왔다. 오늘의 아침도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수천 년 전 적힌 절대 진리의 성경은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달리 해석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성경은 절대 진리일 수 없는 것인가? 만약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보이는 오류라면 왜 성경 수정을 그리도 두려워하는가?



공룡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쥬라기공원 1편을 보면 아픈 트리케라톱스가 쓰러진 곳 주변의 독풀을 먹지 않는다는 하딩 박사의 꽤 확신하는 말투에도 새틀러 박사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며 직접 대변에 손을 넣어가며 검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딩 박사는 자신의 말이 충분하지 않은 새틀러 박사 행동에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학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과학은 수없이 많은 관찰과 확인의 과정을 거치고, 그렇게 나온 논문도 학계의 인정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종교가 이야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윤리 도덕적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제안하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앞으로도 과학은 특유의 자정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발전해 나갈 텐데.. 종교는 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오래 전의 난처한 오답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과거 그 오답을 적어내기 위해 종교는 어떤 관찰이랄 것을 했을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권은 무엇일까? 단지 허상이 아닐까?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내가 보는 현실은 정말 현실일까?

시간이란 무엇일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윤리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무엇일까?

자유란 무엇이고 진정한 자유란 가능할까?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과학은 나에게 어려운 질문을 탐구하기 위한 유용하고 필수적인 틀을 제공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아서, 이제는 과학이 제공하는 틀 없이 이런 질문들을 탐구하기란 매우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과학을 배우다 보면 인간의 존재가 이 지구뿐 아니라 우주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정량적 평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자연에 대한 끝없는 경외가 쌓여만 간다. 과학 발전의 역사를 보고 있으면 그 법칙을 발견한 우리들보다도 이런 단순하고도 섬세한 법칙을 거시적 또는 미시적 수준에서 차분하고 태연하게 따르는 자연의 위대함에 말문이 막힌다. 이미 자연과 신의 개념을 꽤 많이 일치시킨 나의 입장에서 과학은 신(자연)을 더욱 아름다운 예술가로 만들어줄 뿐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나에게 신은 보통 기독교가 말하는 신과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그에 대한 글은 다른 글에 더 어울릴 것 같다.


관측과 계산의 결과를 무조건 불신하는 것은 비이성적 선택이다. 아주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과학이 제공하는 틀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이야기 예시를 들어보려고 한다. 우리가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점을 향해 여행을 시작한다고 해보자. 이 여행을 위해 내가 가진 종이 지도에는 나의 위치와 그 점의 위치가 보인다. 지도에는 출발지, 목적지 두 점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고마운 사람이 와서 두 점 사이의 거리를 표시해준다. 그 사람이 적은 거리가 4000km라면 우리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낫겠다 생각할 것이다. 400km라면 기차, 40km라면 차, 4km라면 걸어서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가야 할 거리를 안 후에도 4000km 거리를 걸어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힘내라며 용기를 북돋아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 여행이 어떤 모습이 될 지에 대한 좋은 기준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무 근거 없이 내뱉는 말이 아니라 그는 이 거리를 재기 위해서 수천 번 측정과 계산과 확인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km단위 자체에 의심을 품을 수도 없다. 우리에겐 이미 1km가 1000m이고 1m가 100cm라는 것, 1cm가 어느 정도 길이인지에 대한 일반적 동의가 있어 알기 때문이다. '여행'은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철학적 윤리적 질문들에 대한 탐구를 말한다. 과학이 하는 일은 바로 이 고마운 사람처럼 거리 표시를 해주는 것이다. 가야 하는 곳까지의 거리를 재주는 것처럼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탐구의 시작을 위한 틀을 마련해준다. 그 사람에게 거리 측정 방법이나 km의 개념에 대한 불신을 무작정 드러내며 화낼 수 없다. 물론 의심할 자유는 있지만 그럴 경우 4000km를 걸어갈 수도 있는 위험은 인지해야 한다. 이 고마운 사람은 이제 지도의 왼쪽 위 귀퉁이에 조그맣게 방위 표시를, 주의해야 할 장애물이나 지형적 특징 등등을 추가해주며 나의 지도를 빠른 속도로 풍부하게 채워주고 있다. 그러나 지도가 충분히 완성되더라도 그 길을 가는 방법과 여정의 풍광은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천체물리학과 진화생물학 등의 관점으로 봐도 인간이 이 지구에 존재하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드문 일이다. 과학이 설명하는 인간의 존재는 종교가 말하는 창조설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상상력과 기적을 수반한다. 게다가 과학이 이렇게 그려내는 '신의 초상화'는 정말 우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신과 자연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이 불편하다면 꼭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된다. 기독교는 유일신인 하느님이 모든 우주 만물을 만들었다고 하니 어떤 모습으로 만들었는지 과학과 함께 한번 바라보자. 고요한 마음으로, 그저 감상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자. 신의 초상화이든 신이 그린 자연의 초상화이든 과학과 함께 하지 않으면 절대 바로 볼 수가 없다. 이를 무시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 따위에 집중하는 일은 내가 보기에 오히려 신에 대한 경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 없는 경멸이 지속되자 현재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가질 수 있었던 우리의 소중한 지구를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죽었으면 하는 사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