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으면 하는 사람이 생겼다.

4. 종교가 나에게 주는 것

by 예나

얼마 전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바란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싫은 사람이 생겼다. 밉다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 밉다는 말에 일말의 정 비슷한 감정이 괜히 나에겐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 사람은 적이다. 나는 그 사람이 그저 싫고, 혐오스럽다. 길가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한 번씩 그의 죽음을 상상하고 바라며 즐거워한다. 카르마를 믿는 나에게 이런 고약한 생각이 들어와 버렸다.


초등학생 때 나는 친구들한테 죽고 싶다고 말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쯤 보통 친구들이 습관처럼 하는 말이었다. 나의 경우 죽음이 궁금해서 그런 말을 한 것 반, 당장의 상황이 짜증 나서 별 뜻 없이 습관처럼 말한 것 반 정도였다. 친구와의 쪽지 대화에서 그걸 본 아빠는 어느 날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거실에 앉혀놓았다. 영문 모르고 아빠 앞에 앉은 나에게 아빠는 가서 불을 끄라고 했다. 불을 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암흑이 찾아왔다. 나는 더듬더듬 아빠 앞을 대충 찾아 다시 앉았다. 아빠는 말했다. "이게 죽음이야. 바로 눈앞에 있어도 아빠가 보이지 않는 것. 죽고 싶다는 말을 할 때 니가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거야. 이런 어둠뿐이야. 그걸 정말 원하는 건지 잘 생각해봐." 죽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죽음을 배운 순간은 그 순간이었다. 가톨릭 신자이신 아빠가 말한 죽음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어둠이었고, 지금도 나에겐 죽음이 그뿐이다. 맞다. 우리가 사는 차원을 훌쩍 넘어선 과학자들의 상상력까지 탈탈 털어봐도 이 우주에는 천국과 지옥이 들어갈 공간이 내겐 없어 보인다.




당신의 윤리는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며, 그리고 수업을 하면서 내가 즐겨했던 질문이었다. 꼭 종교인 혹은 비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앞세워 대답할 필요가 없었던 상황에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윤리가 부모님에서 비롯되었다고 답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오며 나름대로 정립한 어떤 윤리라고 할만한 것은 대부분이 부모님으로부터 취득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책, 선생님, 미디어 등 다양한 경로도 있었다. 철학을 너무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다양한 철학책을 읽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나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무래도 종교는 없는 듯하다. 아빠는 독실했지만 나와 동생에게 성경을 읽어준다거나 신에 대해 말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나를 가르칠 때 종교적일 것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대화할 때 예수님이 어쩌고 하느님이 어쩌고 하는 말로 시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주 갔던 성당 미사는 나에게 몸이 익힌 대로 기계적으로 앉았다 일어서며 온갖 공상을 할 수 있는 한 시간일 뿐이었다.


...


잠깐. 정말 그럴까? 내 윤리에서 종교의 영향이 정말 없었을까? 각자에게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있을 윤리를 선악의 기준과 그에 따른 도덕적 당위라고 대충 정리하고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았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인간 특유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악은 본래 상대적이고 유연한 개념인데, 종교의 목적은 "인간"의 선이 유일해 보인다. 자연과 동물을 충분히 포함하는 종교의 교리도 그 바탕에는 인간 중심의 선이라는 목적이 숨어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듯한 불교에서조차 인간이 현생에서 충분히 덕을 쌓지 못하면 윤회 과정에서 인간이 되지 못하는 형벌적 결과가 주어진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종교는 인간의 선이라는 목적을 위해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능력을 제한하는 죄의 개념을 만들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연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종교가 만들어낸 죄의 개념을 우리가 충분히 오랜 기간 체화했기 때문에 당연해졌다.


종교는 역사를 걸어오며 현대 윤리 개념의 많은 것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지위를 개인을 넘어서 국가의 최고 권력까지 구속하는 강력한 어떤 힘으로 상승시켰다. 즉 종교는 국가의 법을 초월하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색이 짙은 미국에서 오바마 재임 시절 동성혼 합헌이라는 역사적 결정을 내린 것에 나는 특히 감격했다─물론 지금도 미국에서 많은 성소수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또는 누군가의 잘못된 종교적 믿음에 비롯한 윤리 의식에 의해) 살해당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교인이든 아니든 성윤리에 굉장히 딱딱하고 좁은 시야를 가지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성윤리까지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응징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 또한 기독교와 유교(유교가 종교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등 종교가 크게 한몫했다고 본다. 거기에 바른 성교육의 결여까지 더하니 우리나라는 성에 대해서 아주 왜곡되고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안타깝다.


아무튼 이렇게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배역과 내 인생에서 종교가 맡은 배역에 대해 넉넉한 입장을 취한다면, 나의 윤리가 종교적인 색을 띠지 않는다고 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어떻게 보면 지구 위 어디든 인간으로 사는 한 완전한 무종교주의자가 되기란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것보다도 어려워 보인다. 아이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이 너한테 그러면 기분이 어떻겠어?"라는 식의 훈육이 불가능해지고 종교적인 색을 완전히 배제한 철학에서만 윤리를 취해야 가능할 것이다. 특정 종교일 필요는 없지만 이런저런 다양한 종교의 윤리가 짬뽕된 형태로 나에게 왔다. 부모님과 선생님과 미디어와 책 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 전체가 공감할 공통적 윤리 가치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꼭 하나를 꼽아서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적당한 합의에 이미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공통 윤리를 해치는 일이 일어나면 이를 느낄 수 있다. 그게 정말 옳거나 그른지, 왜 옳고 그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일단 혐오하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마치 물이 무맛으로 느껴지도록 진화한 우리의 혀처럼 한 종교의 교리가 나쁜 목적으로 변질되고 더럽혀졌을 때 우리는 곧바로 탐지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 더럽혀진 교리에 대한 믿음이 본질적인 것을 압도하면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이야기에 과도하게 집중하며 종교를 미신적인 어떤 것으로 바꾸고 있다. 그들은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더럽혀진 물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마시는 물은 더럽혀지지 않은 물이라고 확신할지라도 이게 정말 완전무결한지에 대한 적당한 의심은 언제나 건강하다. 그리고 내 물을 상대방에게 권했을 때 당장 마시지 않고 의심하거나 싫다고 거부하더라도 기분 나빠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물보다 곡물차나 연한 커피를 좋아하는 것처럼 "오염"된 물이 꼭 건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는다면 그 죽음은 나의 사건이지만 내 주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일이다. 나의 죽음은 나와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될 어둠이다. 따라서 아빠의 가르침에 따라 내가 죽지 않아야 할 이유는 알겠다. 하지만 내가 저 인간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내 믿음에 따르면 죽음은 어둠일 뿐이고 고통이나 지옥 따위의 개념이 아닌데? 저 인간이 죽는다고 해서 슬퍼할 사람도 많지 않아 보이고, 슬프면 또 어때? 슬프더라도 곧 지나갈 고통일만큼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인 것 같은데? 내가 볼 때 어둠이 마땅한 그 사람의 죽음을 바라거나 내가 직접 행하는 것이 왜 나에겐 상상만으로 그쳐야 할 일인가. 솔직히 말해 그 이유가 "법이 금지해서" 뿐이라면 나에게 충분한 설득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차와 커피를 물보다 훨씬 좋아하지만, 죽었으면 하는 저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에는 내가 우연히 마셔온 종교적 물이 한몫한 듯하다. 그것은 종교가 포괄적 문화 체계로써 군림한 역사의 시간들과 그 시간 속에서 사회에 간접적으로 가르친 것들, 그에 스며든 사회가 나의 부모의 부모에게 간접적으로 가르친 것들, 그것을 배운 나의 부모가 나에게 간접적으로 가르친 것들 때문일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너한테 그러면 기분이 어떻겠어?"> 의미를 너무나 잘 안다. 나는 그래서 나의 적을, 내가 혐오해 마지않은 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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