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sor Oct 29. 2022

지남철

흔들려도 이상하지 않는 그 바늘

브런치에 글을 올릴 시간은 사실 차고 넘쳤다.

다른 글 보다 대본을 써야 하는 것이 작가 지망생에게는 운명이자 숙명이라서 그런 것일까.

에세이 형식의 그것도 내 이야기를 써야 하는 브런치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너무 많은 감정을 여기에 남겨두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 후회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

그럼에도 오늘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권의 책을 보고, 그 안에 등장한 단어 하나를 보고

지금 나의 인생과 무엇이 다를까 싶은 생각이 들고 이 기분을 기억하고 싶어서다.


사실 여름부터 지금까지 지지부진한 날들의 연속이다.

무더웠던 8월 중순 즈음 내 눈에는 너무나 좋고 완벽한 대본을 또 수정했다.

작가님과 했던 그 마감은 정말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마감이며, 마감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상황을 과연 내가 경험할 수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후 긴 슬럼프에 빠졌다. 타이밍 잘 맞게 작가님께서도 작업실에 당분간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었기도 했다.


나보다 더 열심히 하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 작가님의 대본이, 엄청나게 좋은 우리의 대본이 편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이제 막 망생의 삶을 시작하는 나는 좋은 대본은 분명 편성이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작가님처럼 잘 쓰게 되어도 편성이란 걸 받을 수는 있는 걸까?'

'이 길이 정말 맞나? 내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선택 자체가 틀리면 나는 어쩌지?'

'... 운이 안 따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 작가님의 대본은 힘들 때 꺼내먹는 초콜릿과 같은 위안과 위로를 주는 작품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대본이 가진 가치를 몰라주는 방송국 놈들, 윗대가리 놈들에게 분노하고 때때로 욕지거리를 날리면서 지냈다. 작업실에 있을 때 이미 초연하신 작가님을 보면서 울컥하는 순간도 떠올랐고 그때마다 극대노를 밥 먹듯 하는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시기도 했지만 몇몇 위로는 말뿐인 위로로 가슴에 남지는 않았었다, 사실. (작가님의 대본을 통해 위로를 많이 받아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8월의 마지막쯤, 2주 이상 작가님 사무실에 나가지 않았던 때 작가님께서 연락을 주셨고 말씀하셨다.


'네 단막 1편을 9월 말까지 써 와. 보조작가 월급 줄게. 난 너라는 사람의 꿈에 투자하는 거야'


그렇게 8월 말부터 9월 말까지 한 달 동안 나는 대 첫 단막극 대본을 완성했다. 부족한 것 투성이인 그 대본을 완성시켜서 작가님께 처음으로 보여드린 그날, 난 작업실을 나와 상암동을 마구 배회했다.


'쓰레기인데, 원래 초고는 쓰레기고 내가 쓴 건 분명 개쓰레기일 텐데... 기획안도 제대로 마무리 못했는데 미쳤나 봐 진짜...'


글에 대한 자신감은 대체 언제 생기는 것인가 싶다가도 너무 빨리 잘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반성도 했다. 하지만 잘 쓰는 작가가 빠르게 되어서 기왕이면 빨리 공모전에 당선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작가님은 내가 쓴 대본을 정말 꼼꼼히 성심성의껏 봐주시고 피드백을 주셨다. 이상한 부분, 좋았던 대사, 이해 안 되는 설정, 캐릭터에 대한 분석... 대본을 읽는대만 2~3시간, 1시간 반 이상의 피드백을 위해 시간을 할애해주신 작가님에게 지금도 감사하다. 피드백을 다 받고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라고 하셔서 질문했다.


'제 대본이 쓰레기인가요, 작가님?'

'얘! 넌 뭘 말하고 싶은지 대본에서 보여줬어. 그러면 된 거야! 이거 너 첫 대본이잖아? 교육원 나오고 나서도 대본을 통해 주제도 못 전달하는 대본 정말 많아! 고생했다, 잘했어!'


힘들 때마다 꺼내먹을 초콜릿의 순간, 다른 어떤 순간보다 진한 순간이 생겨버린 날이었다.


나침반 안에 있는 그 바늘의 이름이 지남철이라고 한다.

제대로 된 방향을 찾아낼 때까지 끊임없이 흔들려도 이상하지 않는 그 바늘.

요새 그 지남철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고 싶은 목적지는 분명하기에 흔들리고 흔들리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쉽지 않은 길 내가 선택했고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오늘도 흔들리고 흔들렸다.

그렇게 난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이 방향이 맞다, 몇 번을 생각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