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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Oct 25. 2020

82년생이 간다

야구 이야기

한화 이글스 김태균 선수의 은퇴 기자회견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1982년생, 올해로 39살이다.  이글스 팬은 아니지만, 한 구단에서만 20년 동안 몸담았던 프랜차이즈 선수의 은퇴를 지켜보는 것은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글스에서는 레전드이고 여러 국제대회에서 국가대표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선수지만, 나에게 김태균 선수는 자이언츠와의 벤치 클리어링으로 각인되어 있다.

       

프로야구에서 불문율이긴 하지만, 대개 투수가 던진 공에 타자가 맞으면 투수는 타자 쪽으로 미안한 제스처를 취한다. 모자를 벗어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사람도 있고, 눈빛이나 손짓으로 미안함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고, 야구 모자를 만지면서 가볍게 목례하는 사람도 있다. 야구는 좋아하지만 선수들의 엄격한 서열 문화까지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다. 여하튼 투수가 후배인 경우는 더욱 깍듯이 인사한다. 공에 맞은 타자는 쿨하게 괜찮다는 의사 표시를 한다. 상황 종료. 그러면 일반적으로 상황이 끝난다.  

     

2012년 이글스와 자이언츠 경기에서 투수 김성배가 던진 공이 타자 김태균의 등을 맞혔다. 빠른 공에 맞았으니 김태균 선수는 순간 악 소리를 냈다. 손가락에서 공이 빠지면서 타자 몸에 맞힌 듯했다. 김태균 선수는 1루로 걸어 나가면서 투수 쪽을 째려봤고, 투수도 타자의 행동에 기분이 나빴다. 타자는 투수가 미안함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이유였고, 투수는 고의성이 없기 때문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후배 주제에 선배를 맞히고 인사도 안 하냐며 김태균 선수는 계속 얘기했고, 후배 주제에 선배에게 대든다며 김성배 선수는 버텼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뒤따라가던 포수 강민호는 김태균 선수에게 속삭였다. 성배 형이 선배야...

      

순간 김태균 선수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묻어났다. 얼굴로만 따지면 본인보다 후배 같았는데, 알고 보니 1살 많은 선배였던 것이다. 선배라고? 세상에! 김성배 선수는 김태균 선수가 본인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머쓱한 상황에서 김태균 선수는 야구 장갑만 만지작거렸다. 경기 다음 날 김태균 선수는 김성배 선수를 찾아가서 선배임을 몰라봐서 죄송했다며 사과했다. 우스갯소리로 ‘동안 벤치 클리어링’이다.      


김태균 선수는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선배를 깍듯하게 대하고 후배에게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4번 타자가 홈런을 못 친다며 똑딱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지만, 정확한 타격으로 필요한 순간에 안타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최고인 선수다. 올해 팔꿈치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간 후 절치부심하여 1군 복귀를 노렸으나 쉽지 않은 듯했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프랜차이즈 선수의 은퇴는 소박하고 조용히 이루어졌다. 2군 경기장에서 덤덤하게 짐을 뺐고 1군 선수들과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지만, 은퇴 기자회견 장에서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김태균 선수의 얼굴에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20년 선수 생활을 끝냈다는 후련함,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는 한스러움, 부상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은퇴하고 싶은 최고 타자로서의 자존심, 지금까지 야구할 수 있게 도와준 프런트, 코치, 부모님, 가족에 대한 고마움... 그 모든 것이 뭉쳐져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흘러내리는 듯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는 짧은 기자회견 장에서 말하지 못하는 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은퇴 깃발을 스스로 꽂은 김태균 선수의 결정과 용기는 정말 대단하다. 지금까지의 경력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으니까. 좀 더 다닐 수 있을 것 같고, 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고,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몸 관리를 잘해서 1년 더 뛰고 싶은 마음이, 에이징 커브를 이겨내고 누구보다 떳떳하게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김태균 선수에게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면서 밤잠을 설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여기까지임을 스스로 알고 후배에게 민폐가 되지 않는 선배로 남는 길을 택했다. 그 결정과 용기가 참 부럽고 멋지다.

      

불꽃 한화에서 불꽃같은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니, 앞으로의 생활도 불꽃같았으면 한다. 야구선수로는 마침표지만 또 다른 인생으로는 시작점이니까.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에게 앞으로는 꽃길만 펼쳐지길 바란다고 하는데, 김태균 선수의 앞날에는 꽃길뿐만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길이 펼쳐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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