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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Oct 23. 2020

외박을 허락받고 싶은 나이

일상 이야기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이 끝난 날은 친구들과 만화책을 빌려서 봤다. 지금은 웹툰이나 e-북이 대세라서 굳이 만화방까지 가는 수고로움이 필요 없지만, 중학교 때만 해도 담배 냄새나는 만화방에서 한쪽 구석에 박혀서 만화책을 보거나 돈을 좀 더 주고 빌려와서 집에서 읽었다. 황미나 작가의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굿바이 미스터 블랙>, <아뉴스데이>, 강경옥 작가의 <별빛 속에>,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등은 모두 이때 봤던 만화책들이다. 아우, 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다. 친구 동생까지 포함해서 4명이 만화책을 돌려가면서 봐야 했기 때문에 먼저 읽은 사람은 다음 편을 읽고 있는 사람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결과가 궁금하면 순서와 상관없이 읽기도 했다. 친구 집에서 밤샘을 하는 거라 부모님은 외박을 허락해주셨다. 물론, 숙제를 한다거나 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댔다.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지만 만화책을 본다고 정직하게 말하면 외박 허락을 안 해 주실 듯했다.           


20살 때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나는 물리적 나이는 어른이었고, 정신적 나이는 중학생 수준이었다. 사춘기가 온 것도 아닌데 부모님의 간섭이 부담스러웠고 동아리 방에서 밤새 얘기하면서 술을 먹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솔깃했다. 학교 과제가 많아 동아리방에서 밤샘을 한다고 말했더니, 부모님은 외박을 허락해 주셨다. 기껏해야 맥주 몇 병과 과자 몇 봉지 사놓고 친구들과 수다 떠는 일이 다였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외박 허락을 안 해 주실 듯했다. 나는 그렇게 과제 핑계를 댔는데, 같이 온 친구 중 한 명은 내 핑계를 댄 듯했다. 당시 외박이 잦았던 친구는 우리 집에서 친구들이 몇 명 모인다고 했나 보다. 남자 친구와 여행 갈 때도 나와 같이 간다고 핑계를 대더니 너무 자주 써먹긴 했다. 나와 입이라도 맞췄으면 엄마한테라도 말해놨을 텐데, 눈치 빠른 친구의 언니가 우리 집에 전화해서 거짓말이 들통났다. 친구는 그날 밤에 당장 집으로 불려 가지는 않았지만, 친구 언니한테 건수가 잡혀서 아끼던 옷을 뺏겼다고 했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캠핑을 다녀오자는 말에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메쉬 소재의 텐트지만 침낭을 뒤집어쓰고 자면 초가을까지는 그럭저럭 잘만 하다. 예약한 곳에 1인용 텐트 3개를 설치하고 식사할 수 있는 공용 공간까지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여유가 있다. 서울에서도 멀지 않고 주변 경치도 좋아서 만족도가 높은 캠핑장이다. 내가 있는 곳은 E 캠핑장이었는데, 다른 곳도 궁금해서 산책 겸 슬슬 걸었다. 오토캠핑장 아니랄까 봐 장비들이 장난 아니다. 잠잘 수 있는 텐트 하나에 리빙쉘 텐트까지는 기본으로 갖춘 곳이 꽤 됐다. 인디언 무늬의 타프나 정사각형 쉘터는 좀 탐이 난다. 감성캠핑을 즐기는 사람도 곳곳에서 보였다. 가렌다나 색색깔 알전구를 타프 앞쪽에 설치하거나, 좀 이른 시간인데도 화로에 불을 지펴 불멍을 즐기기도 했다. 고기를 굽는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고, 어느 텐트인지 몰라도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연인처럼 보이는 커플도 제법 있다. 집에는 사실대로 말하고 왔는지 궁금하네. 습관처럼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보시는 중이었던 듯하다. 어디냐고 물어서 친구들과 캠핑을 왔다고 했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떨어지니 감기 조심하라고 하신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외박한다는 말을 참 쉽게도 한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딸이 땅바닥에서 잠을 잔다는 데 재미있게 놀다가 들어가라고 하신다. 숙제를 하거나 과제 때문에 외박해도 되냐고 허락받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이를 먹었구나 싶다. 엄마한테 하얀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좋은 건가. 같이 만화책을 보던 친구는 이제 작은 글씨까지는 잘 보이지 않아 우울해하고, 남자 친구와 외박하기 위해 내 핑계를 댔던 친구는 이제 딸의 외박을 걱정할 나이가 되었다. 외박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야 외박 허락을 받고 싶은 심리는 대체 뭔지... 나는 전생에 청개구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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