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바람 타는 여여사
Oct 22. 2020
오후가 되니 정신이 멍 하다. 창문을 비추는 햇살이 좋아서 하던 일을 접고 밖으로 나왔다. 파란 하늘은 오늘 같은 날씨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릴 정도로 바람도 불어서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다. 이런 날에는 아이스크림 정도는 먹어줘야 할 듯하다.
편의점에 들러 익숙한 아이스크림을 뒤적뒤적하다가 돼지콘을 발견했다. 돼지 그림도 익숙하고 글씨체도 비슷한 걸 보니 돼지바를 돼지콘으로 만든 건가. 얼른 하나를 집어 계산을 하고 나왔다. 더욱 맛있어진, 욕심부린 돼지콘이란다. 광고 문구에서 사기꾼 냄새가 난다. 부드러움과 풍부함까지 업그레이드됐다며 돼지바보다 가격도 비쌌다. 뭐든지 업그레이드되면 기본 가격이 오른다. 나도 돼지바처럼 업그레이드되면 가격이 올라가려나. 사람은 어떻게 해야 업그레이드되는 건가. 부드러움과 풍부함은 업그레이드됐는지 몰라도 돼지콘은 돼지바보다 내 입맛에 썩 맞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달달한 맛에 기분은 업그레이드됐다.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걷는다. 왼쪽으로는 식당 유리문에 붙인 포스터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사진 전시가 진행 중이다. 점심은 먹었으니 사진 전시나 구경하고 들어가면 되겠군. 어라? 치즈 향과 토마토소스 냄새를 풍기는 식당 유리문에 붙은 포스터의 문구가 좀 이상했다. 멈춰 서서 한참을 읽어봤다.
『40,000원 런치 세트를 할인하여 19,800원에 판매! 소확행을 즐기는 방법!』
그러니까 19,800원으로 소확행을 즐기라는 건데... 40,000원의 가치가 있는 음식을 반값에 먹으면 제값보다 싸게 먹는 것이니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즐기는 것인가. 원래 가격이 19,800원이 아니었는지 의심마저 든다. 손에 쥐어진 통통한 돼지콘은 1,800원 짜리지만 나는 지금 달달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돼지콘의 광고만큼 포스터의 소확행 문구에서 사기꾼 냄새가 확 난다. 하긴, 누군가는 반값 행사에 소확행을 즐길지도 모르니, 사기라고 말하는 건 편향된 시각일 수도 있겠군. 어차피 내가 안 먹으면 그만이니까.
오른쪽에 길게 늘어선 전시는 서울 글로벌 포토저널리즘 사진전이었다. 이런 전시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코로나-19가 가져온 혼돈과 단절된 세계에서 전 세계 포토저널리스트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사진 전시의 취지를 바로 알 수 있는 문구다. 사기꾼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20여 점의 사진이 전시되었는데, 그중 단연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비닐을 사이에 두고 부녀가 포옹하는 모습이다. 코로나에 걸린 아버지는 격리 중이었고, 딸은 한 달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비닐 구멍에 각자의 팔을 끼우고 마스크를 쓴 채 두 눈을 꼭 감고 부녀는 포옹했다. 그래도 살아서 만나니 안도가 느껴지고, 비닐을 사이에 두고 만나니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코로나 이전에는 아침저녁으로 했을지도 모를 포옹이 아닌가. 행복인지도 모르고 일상적으로 했던 일인데, 코로나 이후에는 그 짧은 행복마저 크게 느껴진다.
사진을 보고 나니 내가 사치를 부렸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반값 행사에 소확행을 느끼면 어떻고, 광고 문구에 홀려 소확행을 느끼면 어떤가. 지금은 소확행을 누릴 수 있다는 데 희망을 둬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일상적으로 했던 가족과의 포옹마저도 소중하게 느껴야 하는 시기가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