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는 내가 앉아 있는 침대 발치에 몸을 던져 이불에 얼굴을 푹 처박았다. 엎어진 채 뻗은 동생 손에는 믹서기에서 분리된 유리 용기가 들려 있었다. 참고로 동생과 나는 벽장을 사이에 둔 다른 집에서 각자 살고 있다. 지붕은 같지만 현관문이 따로 있는 엄연히 다른 공간이다. 약속한 시간에 주로 만날뿐 웬만하면 상대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쿠션을 받치고 앉아 스마트폰 폴라리스오피스를 열어 일거리로 받은 원고 교정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책상에 앉기 싫은 이른 아침엔 보통 침대에서 폰을 켜서 일을 하는 편이다. 원고에 몰두하고 있던 차라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잠시 사태 파악을 해야 했다. 일단 저장을 눌러놓고 폰을 껐다.
"뭐야?"
물었더니 다시금 그 사는 게 어쩌고 오천 원에 어쩌고를 세상 불쌍한 말투로 되풀이했다. 손에 든 유리 물건을 사달라는 말인 것은 이해했는데 참 혼자 보기도, 듣기도 아까웠다. 뭔 까닭인지는 몰라도 일단 사주지 않고는 못 배길 꼬라지였다. 몇 마디 더 지껄인 걸로 상황 요약을 해보자면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유리 믹서기가 망가졌고 그로 인해 절망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문제의 믹서기는 동생이 서너 달 전인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입한 것이다. 믹서기라는 게 한두 해 쓰다 보면 작동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주로 모터 이상이다. 이번엔 제대로 된 믹서기를 구입하고 말겠다며 꽤 심사숙고하여 산 믹서기였다. 믹서기를 사기까지 내게 몇 차례나 자문을 구했기에 나도 과정을 알고 있다. 동생이 믹서기를 고른 기준은 네 가지였다.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재질,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모터, 부담 없는 생김새와 가격. 그러니까 내구성 내열성을 갖춘 티타늄 재질 칼날에 비스페놀 걱정이 없는 강화유리, 700와트 이상 강력 모터는 물론 단순한 외형에 가격도 저렴해야 했다. 온라인 쇼핑몰에 믹서기를 검색하면 수백 개도 넘는 제품이 올라온다. 원하는 조건에 맞는 물품을 찾기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 탐구할 수밖에 없다. 제품 설명서 검토는 기본이고 각 포털사이트에 흩어진 사용후기들도 샅샅이 훑으면서 차츰 선택 범위를 좁혀가야 하는 것이다. 결정에 이를 즈음엔 거의 전문가 수준이 된다. 어디서 누가 만든 제품인지 그 회사의 기업정신은 어떠한지까지 살피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결단을 앞두고는 마음과 현실 괴리에도 갈등해야 한다. 가격과 조건, 성능을 고려할 땐 얘가 적당한데 마음은 어쩐지 쟤한테 끌리는 갈등. 그렇게 상당히 긴 시간 온갖 분석, 종합을 거친 정신적 노동을 하여 마침내 구입한 믹서기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망가지고 만 것이다. 이번 고장은 모터가 아니라 유리 용기에 끼워 사용하는 칼날 고정 바닥에 금이 갔다고 했다. 작동 시 모터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힘을 지탱해야 하는 부분이라 금이 간 채로 쓰다간 위험할 수 있었다.
"사줄게."
나는 말했다.
"정말?"
뜻밖이었는지 동생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저로선 속상한김에 투정을 해 본 것일텐데 그걸 대뜸 받아주는 것이 어이없는 모양이었다.
동생이 지폐를 팔랑팔랑 흔들며 제 집으로 건너간 뒤, 나는 이불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투명한 물체와 잠시 대면했다. 어쩌다가 내 이불에 불시착했을까.제자리를 벗어난 사물은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그래도강화유리답게 두툼한 것이 뚝심은 있어 보였다. 얘를 어디다 쓴담. 궁리해 보아도 신통치 않을 것이었다. 나는 유리를 창가에 옮겨 놓았다. 어찌나 무거운지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고 가야 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손목에 무리가 가는 무거운 물건은 되도록 사절이다. 즐겨 쓰던 이천 도자기 그릇도 특별할 경우나 꺼내고 믹서기도 가벼운 핸드믹서를 쓰고 있다.창 너머 세상은날이 밝았음에도 어둑신하다. 곧 비라도 내릴 모양이다. 이례적으로 기온이 높은 12월,며칠째낮 기온이 영상 10도를 웃돌고 있다. 흐린 날이 잦아 비가 간간이 내리다가 밤엔 눈으로 바뀌곤 한다. 눈도 비도 좋아하는데 이젠 마음 편히 즐기기가 힘들다. 비가 좀 강하게 온다 싶으면 지붕에서 천장으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다. 비가 줄곧 내릴 때면 천장에 조금씩 고인 빗물이 판자에 스며 실내에까지 떨어진다. 똑 똑 똑. 마음의 평온을 잃게 하는 소리다. 원인은 짐작하고 있다. 지붕 패널에 사용한 지붕캡들이 낡아서 누수가 되는 것이다. 작년가을 집 안팎 수리를 할 때 헐거워진 지붕캡에 실리콘으로 방수처리를 했다. 한동안 괜찮더니 올겨울 초부터 다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빗물이 마구 새는 건 아니어서 천장 판자에 구멍을 내어 고인 빗물을 뺄 수 있게 장치를 달아 놓았다. 빗소리가 나면 그 아래 양동이를 갖다 놓는 걸로 임시방편이 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봄이 오면 지붕캡을 새로 교체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동생과 내 집을 합쳐 50평이나 되는 지붕에 수십 개는 달린 캡을 다 교체하려면 전문 업체를 불러야 한다. 그런 뒤에도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땐 지붕 전체를 다시 씌워야 할 것이다.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뭐, 지붕이 무너질 것도 아니고 하며 창가에서 돌아선다.
살아 있으니 문제가 생긴다.문제가 없다는 건 삶 또한 없다는 것. 그러니 각 시대마다현세를 가장 힘들다 여길만 했다. 그만큼 어느 시대 어느 하루도 수월치 않은 것이다. 흔히 말하는 그때가 좋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지나고 나면 모두 그때가 된다. 결국 괜찮아진다는 말이다. 믹서기를 들고 와 사는 게 어쩌고 한 내 동생도 이미 괜찮은 것이다. 정작 힘든 일에는 엄살이 나오지 않는다. 이젠 창가를 지키고 있는 두툼한 유리 용기를 볼 때마다 웃게 생겼다. 어쩌면 유리 용기의 새로운 용도는 그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