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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숲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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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Apr 07. 2024

사전 투표

  내겐 오래된 물건이 많다. , 그릇, 가구, , 이불 같은. 식품이 주류인 생필품 말고는 물건을 거의 사지 않는 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다. 산골에 와서 산 뒤로 특히 그렇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이렇게 많은 물건이 모였나 싶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다지도 많은 물건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따금 삶이 복잡하고 무겁다고 여겨질 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들을 죄다 치워버리고 싶어 진다. 더구나 봄이 아닌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부드러운 햇살 속으로 지칠 때까지 걸어가고 싶은 봄. 

    

  그리하여 정리를 시작했다. 집안을 여러 구역으로 나눠 놓고 하루 한 구역씩만 정리하고 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리라, 마음먹지만 쉽지 않다. 여분은 있어야지, 하고 같은 종류 두어 개를 더 챙기게 되고, 여분의 여분까지 결국 남겨 놓는다. 여긴 물건이 귀한 곳이니까, 변명이 뒤따른다. 무용하다 해도 사실은 곁에 두고 싶은 것이다. 오래된 물건들은 그렇다. 막상 마주 대하면 그 속에 이야기가 있다. 책을 버리지 못하는 심정과 비슷하다. 

    

   정리 나흘째, 목표는 이불이었다. 한창 정리 중에 옆집 동생이 건너왔다. 사전 투표를 하러 가자고 했다.

  "뭐 하러. 당일에 가면 되지."

  나는 회색 워싱면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무 낡아서 버릴 생각으로 꺼낸 것인데 막상 눈앞에 펼치니 새삼 애정이 일깨워졌다. 아끼느라 몇 년째 사용을 꺼렸다는 것도 떠올랐다. 오죽하면 솜이 드러나는 낡은 테두리를 보수하려고 천을 잇대어 둘렀을까.

  "사전 투표 하고 싶어. 사전 투표율이 높으면 본 투표율도 높아질 거야."

  동생이 말했다. 이번 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동생은 관심이 많다. 한동안 관련 뉴스와 영상을 열심히 챙겨보는가 싶더니 이젠 사전 투표를 하러 가자고 재촉하는 것이다. 좋아, 하고 나는 마음을 정했다. 미련이 남은 이불은 다시 넣어 두기로 했다.

     

  사전 투표를 하러 갔다. 이불 정리를 하다 말고 투표하러 가기는 처음이고, 사전 투표라는 것도 처음 해 보았다. 지역구 국회의원 3명 중 한 명을 선출하고 비례대표 정당을 선택하는 일.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이니 올해 530일부터 4년간 나라 살림을 맡기는 중요한 행사다. 투표 장소는 읍내 공원 내의 면민회관이었다. 늘 비어 있던 공원 주차장은 빈자리가 없었고 어린 군인과 공무원들이 공원에 가득했다. 한꺼번에 그리 많은 말쑥한 정복 차림의 사람을 구경할 기회란 드물었다. 공원 나무숲과 풀밭엔 새잎인지 꽃인지 모를 연둣빛과 노란빛이 환한 햇살을 담아 어른거렸다. 마치 지역 축제라도 온 것 같았다. 군인들 뒤, 긴 줄 끝에 섰다. 누군가 나타나 지역주민인가 묻더니 줄을 서지 않고 투표할 수 있게 안내했다. 신분증과 엄지로 본인 확인을 하고 투표지 두 장을 받았다. 지역구 의원 용지보다 비례대표 용지가 두 배로 길었다. 칸막이 안에서 도장을 찍고 용지를 반 접어 투표함에 넣고 나왔다.    

 

  "어디서 팝콘 튀기는 냄새 나지 않아?"

 공원을 가로질러 상점가로 나오며 동생이 말했다. 동생 말대로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러네. 근데 팝콘이 아니고 강냉이 냄새 같다."

  그러고 보니 장날이었다. 장이 서는 골목과 길가에 색색 차일이 쳐져 있고 늘어선 좌판이 보였다. 구경꾼만큼이나 상인이 많았지만 활기차 보였다. 꽃모종이며 묘목을 파는 곳엔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긴 겨울을 지난, 봄의 장날이었다. 동생은 손두부를 사고 나는 대파 모종 열 개를 샀다. 집에 돌아와 마당 텃밭에 대파를 심었다. 여린 모종이지만 곧 풍성하게 자랄 것이다. 한번 제대로 심으면 매해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다. 집안 정리를 하다 말고 투표를 하고 왔을 뿐인데 봄 축제에 다녀온 기분이라니. 앞날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집 정리는 내일부터 다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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