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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숲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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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Mar 24. 2024

고양이 밥그릇

  양이 밥그릇이 사라졌다.

  늘 그 자리에 있으려니 했던 것이 하루아침 이지 않자 어쩐지 세상이 어색해졌다. 일정한 거리와 리듬으로 태양을 돌고 있던 지구가 일순 박자를 놓친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네. 정말 없나?"

  함께 있던 동생이 재차 확인했다. 정말 없었다. 전날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던 것이지만 지금은 없는 것이다. 사실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양이 밥그릇을 둔 곳은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도로 방호벽 기둥 안이었다. 길에서 잘 보이는 장소는 아니지만 지나가던 누군가의 손을 타지 말란 법도 없었다.

  "어떡하지? 바닥에 그냥 쏟아둬야 하나."

사료통을 가방에서 꺼내든 동생이 난감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누군가 호기심에 꺼내 본 뒤 제자리에 넣어 두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마, 저기 있나 보다."

  나는 소리치며 방호벽 뒤 성긴 풀숲에서 푸른색 바구니를 주워 들었다. 고양이 밥그릇을 담아 두던 납작한 바구니였다. 하지만 함께 있으려니 했던 밥그릇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군사 경계선이 가까운 강원도 산골에 사는 우리 자매는, 아침마다 마을 길을 걸어 고양이들 사료를 챙겨주고 돌아온다. 처음엔 집 마당에 찾아드는 고양이들 밥이나 주던 것이 차츰 길에서 만나게 되는 고양이들에게도 눈길이 갔다. 몇 년째 밥을 주다 보니 일정한 밥자리가 정해져 하루 한 번씩 밥그릇을 채워 놓게 되었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마주 세워진 대전차 방호벽은 길고양이 밥자리로 안성맞춤이었다. 튼튼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중간이 뚫려 통로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고양이들이 뛰어올라 몸을 숨기기 적당했고 눈이나 비가 들이치지 않는 이점도 있었다.

  "이거라도 찾아 다행이네."

  내게 바구니를 받아 든 동생은 그 속에 사료를 부어 방호벽 기둥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바구니가 보이는지 확인해 보았다. 바구니는 푸릇하게 칠해진 방호벽 색과 비슷한 데다 기둥 안쪽이 어둑해서 눈에 거의 띄지 않았다. 누군가 굳이 꺼내려했다면 방호벽에 바짝 붙어 서서 기둥 안으로 팔을 깊숙이 넣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 소행인 거야. 거기가 밥자리인 걸 알고 일부러 가서 꺼낸 거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말했다. 우리 마을에도 나름의 까닭으로 길고양이 밥 주는 것을 편치 않아 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을 것이었다. 사람이 개입하여 야생동물의 자연스러운 먹이활동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까닭도 있겠고, 먹을 걸 챙겨주면 개체수가 늘어난다고 여겨 반기지 않는 점도 있을 것이고.

  "외지인일 수도 있잖아. 지나가다가 우연히 꺼내 보고는 다시 넣어두기 귀찮아서 던져버린 걸지도 몰라."

  방호벽 사이를 지나는 이차선도로는 숲 사이로 길이 난 터라 경치도 좋고 차량이 많지 않기에, 멀리서 운동 삼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 바구니만 있고 밥그릇은 없어진 거야? 혹시 그릇이 탐나서 가져간 걸까."

  "에이, 설마. 사료 담아 두던 걸 누가 탐내."

  내 말에 동생은 예전 신문 기사에 어느 시골집 개 밥그릇이 알고 보니 유물이었다는 내용을 본 적 있다고 했다. ,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가 고양이 밥그릇으로 쓰던 그릇은 가마에서 구운 고풍스러운 갈색조의 사발이었다. 오래전 이천 도자기 마을에 갔을 때 사 온 것으로, 오래도록 내 부엌에서 국그릇 용도로 쓰였다. 모두 네 개였는데 지금은 두 개만 남았고, 그중 하나가 고양이 밥그릇이 되었다. 좋아하는 그릇이긴 했지만 묵직하고 아담한 것이 고양이 밥그릇으로 더없이 적당했기에 내놓게 된 것이었다. 동생 말처럼 혹여 골동품인지 확인해 보려 한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싶었다. 고양이 밥 먹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릇이 탐나 그런 것이었다고.


  마치 뺨을 맞은 거 같아.”

  계속 걸어가던 중에 동생이 중얼거렸다. 누가 무슨 마음으로 그걸 없앤 것인지 온갖 추측을 하던 끝에 울적해진 모양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마을에서도 벗어난 숲 가에 작은 밥그릇 하나 숨겨놓았을 뿐이었다. 어떤 녀석들이 와서 먹고 가는지 모습은 자주 볼 수 없어도 아침이면 그릇은 어김없이 비어 있었다. 설거지라도 한 듯 말끔하게 빈 그릇을 볼 때면 다소 뭉클해지던 그 마음을 누군가 비웃는 것도 같았다.      

  "혹시 저 할머니 아닐까."

  저만치에서 길을 따라 손수레를 밀며 다가오는 박 할머니를 보고 우리는 목소리를 낮췄다. 공공근로를 맡아 마을 청소를 하는 어르신이었다. 고양이들이 쓰레기봉투를 뜯어놓아 문제라는 말을 이따금 하셨으니 혐의 대상으로 꼽을 만했다. 할머니와 거리가 좁혀지자 안녕하세요, 하고 우리는 인사를 했다.

  "날이 마이 풀렸?"

  할머니가 인사를 받았다.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게요. 어젠 바람이 사납더니."

  나는 대답했다. 할머니 말대로  햇살이 부드럽게 일렁이는 날이었다.

  "아니네."

  할머니와 지나쳐 몇 걸음 떼어놓던 동생이 말했다. 그렇게 웃는 얼굴이면 아닌 거라고. 웃음 하나로 할머니는 쉽게 혐의를 벗었다. 어째 할머니 웃음을 본 뒤로 마음 수굿해졌다.

  "밥그릇이 그동안 안 없어진 게 더 이상한 일일 지도 몰라."

  집 마당에 들어서며 나는 말했다.

  "그래. 에 있던 것도 툭하면 없어지는데, 바깥 물건이 몇 년째 고스란히 제자리에 놓여 있었던 건 좀 신통하다."

  동생이 수긍했다.

  "집에서 없어지는 건 건망증이고."

  랑 위 낙엽송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웃음을 터뜨리듯 까악-거렸다. 노랑 생강나무꽃이 어나는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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