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 길도 제목부터
요즘 내 삶이 전만큼 무겁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들은 그 옛날처럼 예리하지 않고, 스치는 모든 것을 잡아뜯지도 않는다. 나는 전처럼 감당 못할 술을 마시지 않고, 그 때문인지 술을 마시고 진상이 되어 엉엉 우는 일도 없지만 이제 와서 술을 마신다고 해도 그때처럼 엉엉 울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꽤 괜찮은 기분이다.
다니엘과 나는 또 한 번 떨어져 지낸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마지막 큰 싸움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창 날카롭게 싸우던 시기에는 그 시절 서로의 도화선이나 싸움의 계기가 된 대화를 의식적으로 피하려 했고, 싸움 자체에 두려움을 품어 신나게 대화하다가도 한 번씩 위축되는 순간이 있었는데 평화롭게 지내는 동안 옅게 남은 (마음의) 상처 자국까지 말끔히 사라졌다.
내가 변해서인지 프랑스도 변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영어로 소통하며 은행 직원의, 마트 직원의 불친절한 태도에 짜증을 품었던 나다. 부족하나마 프랑스어로 말을 걸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 프랑스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영어로 살아가던 프랑스 생활 초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야 다니엘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냥 사람이 퉁명스러워서 틱틱댄 것일 수도 있지만, 프랑스어 억양 때문에 영어로 말하기가 싫거나 자신의 영어 실력에 수줍음을 느껴서 그런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던 말. 전혀 읽히지 않던 광고판의 문장들이 천천히 머리에 들어오고, 다니엘의 도움 없이 우체부 아저씨와 필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지금, 내가 보는 프랑스는 전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내 살림의 5할은 이곳에 있고, 함께 잠들 사람과 무뚝뚝한 고양이와의 생활도 이곳에 있다. 점심시간에 맞춰 음식을 사러 가면 전 회사의 익숙한 얼굴들을 골목에서 마주치고, 좋아하는 장소 여럿은 구글 맵의 안내 없이도 털레털레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이 도시에서 나는 몇 번째인가의 취준생 생활을 해나가게 되었다.
그동안 주제가 확실한 얘기를 많이 했다면 이번에는 다니엘과의 생활이나 프랑스 생활, 취업 준비에 대한 단상을 가리지 않고 써나가 보려 한다. 이번 시리즈 제목은 뭘로 할까 이번 주 내내 고민했는데 친구의 말 한마디가 혜성같이 나타나 쟁쟁한 후보들을 제쳤다!
다른 후보들과 기각 사유는 아래와 같다.
-고오급 백수 : 프랑스어를 열심히 하고 나면 모국어 제외 3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인력이 되는데 지금 나는 백수이기 때문에 자조적인 뉘앙스를 담아 고오급 백수는 어떨까 싶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이런 제목을 걸고 연재했다가 계속 백수가 되면 저금이 바닥난 미래의 일이 걱정이라 이 제목은 안 쓰기로 했다.
-파리취준기 : 이것도 직관적이고 내용도 알기 쉽고 좋을 것 같았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 생활이나 다니엘이랑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도 쓰고 싶은데 취준기라는 제목만 붙이면 취업 준비 얘기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프랑스어가 유창하지 않은 만큼 지원할 수 있는 공고는 많지 않아서 취준기라는 제목을 걸고 연재하기에는 '취준' 분량이 안 나올 것 같아서 기각되었다.
-높이 뛰기 : 인생이 늘 벽이 나타나면 그걸 뛰어넘는 일의 연속이고 프랑스 생활도 마찬가지라서 높이뛰기는 어떨까 싶었는데 지나치게 비유적이고 가슴에 와 닿는 것도 없어서 그만두었다.
원래는 과거했던 일들을 정리하는 연재를 하고자 80% 정도 마음을 굳히고 있었는데 다시 프랑스에 오기 전에 생긴 일 때문에 누군가가 현실에서의 나를 특정하기 쉬운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컨셉에 제목에 그림은 어떻게 그리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서 이 과거 직장 이야기들은 꽤 의욕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직은 조금 무섭다. 그래도 정리한 게 아까워서 2-3년 안으로는 꼭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