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참 멋져

덕분에 나도 내가 좋아졌다

by 체리

내가 맺었던 어떤 관계들에서 사랑은 조건부였다. 내가 '화장을 하고', '옷을 똑바로 갖춰 입고', '내 몸이 어떤 조건을 충족할 때' 비로소 관계는 탄력을 받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 기대와 자신만의 조건을 대놓고 말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들은 결과적으로 내게 '그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미움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했다. 관계의 초반에 상대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거울이라도 몇 번 더 보고, 옷장에 입을 옷이 몇이나 있는지 살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설렘 섞인 행동들에 '못나면 미움받을 거야'라는 두려움이 없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다니엘은 매번 '그렇게 열심히 꾸미지 않아도 된다'라고 해줬지만, 내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외모 평가와 몸가짐의 주입은 가정에서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게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세상에, 이렇게 입고 나가 봐. 사람들이 수군댈걸?' 같은 투의 말에 상처받은 적이라면 있지만, 높은 확률로 엄마의 엄마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상처는 옛날에 지워졌고, 엄마 탓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아무튼,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엄마가 '어머나 이 다리 좀 봐..', '그만 좀 먹어' 같은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심지어 '나 아니면 누가 말하겠어'라는 사명감에 차서 쏘아대는 세상에서 자란 나다. 공포의 모종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평소에는 마치 벽지의 무늬라도 되는 양, 다른 생각에 섞여 잘 보이지 않던 이 공포는 술이 조금 들어가고 미래가 두려워질 때마다 거대해진 그림자를 내 위에 드리웠다. 아무 옷이나 입고, 몸매의 탄력에 신경 쓰지 않은 너는 미움받고 말 거라면서! 외모에 대한 공포는 주가 아니었지만, 이미 다른 공포와 스트레스로 표면 장력을 과시하며 차오른 내 컵에 외모에 관한 스트레스가 떨어지는 건 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외모를 따지는 게 내가 만난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걸 무례하게 표출하는 건 또 다른 문제고) 나만 해도 내가 원하는 외모의 이상형이 있으니까.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조건 없는 사랑'이 얼마나 찾기 힘든 유대인지 실감이 나는 거다. 결국 '네가 더러워도, 냄새나도, 은갈치 투피스에다가 빨간 양말을 신어도 너를 사랑해' 같은 관계는 나랑 인연이 없다고 생각할 때쯤 다니엘을 만났다.


시작은 너무 완벽했고, 사귄 지 1년쯤 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시리즈 <사랑과 뚝배기> 참조-. 그래서 다니엘이랑 사귀는 게 어떤 안정을 얼마만큼 주는지 눈치채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다니엘이 단 한 번도, 장난으로라도 내 외모를 놀린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단 한 번도 외적인 요소로 내게 언짢아하거나 고쳐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도.


지난주 나는 새로 산 핫팬츠를 개시했다. 한창 롱 스커트에 취미를 붙여 입고 다니다가 핫팬츠를 입었더니 다리에 감기는 바람의 감촉이 조금 숭한 것이었다. 안 입던 핫팬츠 차림이 혹시라도 싫지는 않을까 싶어 다니엘에게 '이거 입는 거 어떨까?'라고 물었더니 다니엘이 '절대 나한테 묻지 마! 입고 싶은 거 입어.'라고 했다. 함께하는 3년 내내 늘 이런 태도였다.


이전 시리즈에서 한두 번 언급한 것 같은데, 나는 프랑스에서 지낼 때 아주 얇은 옷을 입는 경우가 아니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다. 신념적인 이유보다는 내가 잘 체하는 편이라 불편 요소를 하나라도 더 없애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다. 거기에 착용을 안 했다는 사실이 잘 티 나지 않는 편이라서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상황에 느끼는 심리적 장벽도 별로 없었다. 단 한 가지 조금 신경 쓰이는 거라면 '다니엘이 싫어하면 어쩌나' 정도였는데 이것 역시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과 함께하면서 치장이나 옷차림에 대해 느끼는 스트레스는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초기에는 외적인 요소 때문에 미움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놓지 못했었다. 어릴 적부터 심어진 공포는 내가 놓고 싶다 해도 간단히 놓아지는 게 아니지 않던가. 그런데 지금은, 샤워를 하지 않아 기름진 머리카락이나 아무렇게나 입은 옷차림에도 안색 하나 안 바꾸고 니가 좋다는 해주는 다니엘 덕분에 공포의 뿌리를 많이 캐냈다. 내 남자친구, 이럴 때 참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