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식탁 투쟁기
"오늘은 뭐 먹지?"
매일 하루 세 번.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고민에 빠져 살고 있다.
존재에 대한 고찰, 코로나 시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메타버스 시대가 온다는데 이런 건 어찌 대응하며 살아야 하는지 등등의 심오한 고민거리도 얼마나 많은데, 인생에서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어쩜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하루에 세 번 씩이나!!!! 메뉴에 대한 고민은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 다른 건 미뤄둘 수 있는데 뭐 먹을지에 대한 고민은 당장의 문제이기에 나 같이 요리에 취미가 없는 사람에게는 정말 고역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니까. 나는 대충 차려 먹는다고 해도 나만 바라보고 있는 내 새끼들은 뭐라도 좀 챙겨 줘야 하니까.
별것도 아닌 사소한 문제가 진심으로 '별것'이 되면서, 하루 중 많은 에너지를 여기에 쏟게 되니 쓸데없이 피곤해졌다. 식사 시간 한두 시간 전부터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고, 일상이 흐트러지는 기분. 책을 읽다가도 '이따 뭐 먹지?', 친구와 차를 마시다가도 "저녁엔 뭐 먹을 거야? 아이디어 좀 줘."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이 오후 5시 42분. 마음속에서 저녁 메뉴에 대한 압박이 또 밀려오고 있다. 이 부담감을 이겨내며 꿋꿋하게 글을 쓰고 있다. 하하. 다들 이런 걸까. 나만 이런 걸까.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정신 상담이라도 받고 와야 하는 게 아닐지. 전생이라는 게 있다면 혹시 밥하다 생을 마감한 슬픈 사연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남편은 이런 나를 알고 있기에 웬만하면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오려고 노력한다. 저녁을 먹지 않고 일찍 퇴근하고 싶은 날에는 꼭 카톡으로 물어본다. "나 오늘 저녁 먹지 말고 갈까?" "자기 편할 대로 해" 일찍 집에 오고 싶어도 내 눈치를 살피는 남편이 어쩐지 좀 안된 거 같아 좀 더 따뜻한 말로 답해주고 싶은데, 남편 몫까지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는 저 정도의 말 밖에 안 나온다. (아이들 식사와 남편이 함께 하는 식사는 또 다른 부담이 있다. 찌개 하나라도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으니)
결국 올 것이 왔다. 남편이 퇴근해 집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현관문을 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빠가 왔도다~~!" 아이 방 책상 모니터 앞에서 이 글을 쓰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남편을 바라봤다. 동공 지진. "아하하하!!! 남편 왔어!"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왜 그래?" " 아니야, 그냥 반가워서..!"
글쓰기는 멈추고 정신 차리고 밥 해야 할 시간이다. 서둘러 주방에 나가 앞치마를 두르는데 뭘 해야 할지 막막해 허둥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반찬을 뭘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밥 먼저 하려고 쌀자루에서 쌀 한 바가지를 퍼고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내가 오늘 주문한 크로와상 생지 안 왔어? 그냥 그거 구워 먹자"
"왔지. 점심에 애들 빵 먹었어. 저녁에도 빵을 줄 수는 없어"
"금방 밥할게"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잠시 쉬고 있겠다며 남편이 방으로 들어가는데, 마음이 무너졌다. 빵이나 달라는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밥을 한다 했는데, 밥 하는 방법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 머릿속은 하얀 백지가 되어 버리고 몸은 꼼짝을 안 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 정말 밥하기 싫어. 맨날 뭐 해야 할지 너무 막막해. 이런 고민을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야 한다는 게 정말 짜증 나. 어떡하지?"
뭐가 서러웠는지, 눈물이 났다. 이게 울 일인가. 지금까지 남편 앞에서 흘린 눈물이 족히 20리터는 넘을 것 같아 흔하디 흔한 눈물이 돼버렸다. 처음부터 이 말에 어떤 위로 따위 기대하지도 않았다. "오늘은 자기가 저녁 좀 할래?" 이게 내 진심이었던 건가? 이 말이 여기서 눈치 없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런 말에 넘어갈 남편은 아니다.
아무튼,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개운해진 마음에 갑자기 밥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흰 쌀에 청보리 쌀을 섞어 씻어주고, 마지막엔 쌀눈 가루를 넣어 밥을 지었다. 오이 하나를 꺼내서 부추 한 줌, 양파 슬라이스 몇 조각을 넣고 매콤 새콤한 오이 무침을 만들고, 냉동실에 있던 5분이면 만들 수 있는 간편 어묵탕, 그리고 통통 후랑크 소시지로 금세 한 상을 차렸다.
아이들과 남편이 맛있다며 밥 한 그릇 씩 뚝딱 해치웠다. 비워진 그릇이 이렇게 만족스러울 거면서 왜 그렇게 고민했을까. 하지만 난 내일도 똑같은 투쟁을 계속하고 있겠지. 언제쯤 나의 식탁 투쟁기를 끝낼 수 있을까. 이젠 정말 타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