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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Aug 01. 2022

내 마음을 울린 청춘의 사랑

유열의 음악 앨범(상세 스포 주의!!)

오래전 나는 영화 한 편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다음 날 직장 동료와 점심 식사에서 방언 터진 사람처럼 그 영화 얘기를 쏟아낸 적이 있다.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동료가 말하길, "영화 한 편 다 본 것 같아요." 그제야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미안해 했는데, 그 영화는 장만옥, 여명 주연의 [첨밀밀]이었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148


얼마 전 나는 다시 한번 그때처럼 모든 장면과 대사를 곱씹어 보고 싶은 영화를 만났는데, 정해인, 김고은 주연 [유열의 음악 앨범]이었다. 생각해 보면, [첨밀밀]과 [유열의 음악 앨범]은 닮은 점이 매우 많은데 두 영화의 교집합 어딘가에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의 정수가 들어 있는 것 같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4812


어쨌든, 내가 본 영화가 너무 좋다고 해서 한 시간씩 그 영화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은 다말증 환자로 직행하는 길이기에 대신 글로 적어보겠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화가들이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사진작가들이 결정적인 장면에 사진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시는 외우고, 좋은 노래는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데, 나는 좋은 영화를 보면 모든 장면과 모든 대사를  외우고 싶다. 이 영화에서 내가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을 어딘가에 새겨놓고 싶은 마음. 언제든지 꺼내서 다시 경험하고 싶은 그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글쓰기 공부를 위해 시나리오를 필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영화를 필사하려고 한다. 시나리오는 감독과 배우들, 촬영팀과 편집팀의 눈과 손을 거쳐 영화로 탄생한다. 그리고, 영화는 내 눈과 나의 마음을 거쳐 내가 이해한 한 편의 영화로 다시 태어난다. 내가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감독과 배우들과 제작팀이 만들어 낸 그 영화가 아니라, "내가 본  영화"이다. 내가 본 [유열의 음악 앨범]은 같은 시간 같은 극장 내 옆자리에서 본 사람의 그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으리라.  이 필사에는 깨알 같은 묘사가 포함되어 있므로,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소년이 있다. 너무 일찍 꼬여버린 인생. 제발 좀 멀쩡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다.


1994년 10월 1일. <유열의 음악 앨범>이 첫 방송을 한다. 이것이 소년에게 기적이 된다.


교복 차림의 더벅머리 소년 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비탈길에 자리한 허름한 동네 빵집 미수제과점에 들어와 두부를 찾는다. 빵집에 두부를 팔 리가 만무하지만, 핀잔을 주는 대신 미수는 두유도 괜찮냐고 응수한다. 하지만 냉장고엔 두유도 없고 우유뿐. 하는 수없이 언덕 위에 슈퍼가 있음을 알려준다. 현우가 나가자마자 들어온 은자 언니. 은자 언니는 미수제과의 제빵사이다. 미수는 방금 있었던 일을 알려주고, 은자는 감방에 다녀온 것이 분명하다며 호들갑을 떤다. 저렇게 잘 생긴 얼굴에 소년원이라니!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사실 빵집에서 나가려는 현우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그의 귀에 라디오 방송 멘트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방송, 사랑, 비행기의 공통점은 시작할 때 가장 많은 에너지가 든다는 것.” 현우는 매일 아침 라디오를 들으며 소년원에서 나가면 무엇이든 좋으니 제발 한 가지만이라도 달라져 있기를 기도했는데, <음악 앨범> 방송의 진행자가 바뀌었던 것이다. 순수하게 우연일 따름이지만, 현우에게는 이것이 기적으로 느껴졌고 삶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소년원 이후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던 현우는 미수제과점을 찾아온다. 미수제과의 아르바이트 구인광고를 들고 들어와 "열심히 할게요"라며 셀프 채용을 한다. 배달 온 계란과 밀가루를 번쩍 들어 주방으로 옮기며 당돌하게도 미수와 은자에게는 두 분은 할 일을 하란다. 당황한 미수는 왜 학교를 가지 않는지, 정말 감방에 갔다온 것인지 묻는다. 현우는 학교는 그만두었다고 즉답을 하지만, 감방을 다녀왔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은자는 이런 현우를 품어주기로 결심하고, 주방으로 가는 길을 터준다. 이렇게 해서 현우는 미수제과점의 식구가 된다.

 

은자 언니는 현우의 머리에 무스를 발라 스타일링을 해준다. 미수도 동참하여 머리와 옷깃을 매만져 주는데, 거울도 보지 못하는 현우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망가져가는지 불안하면서도 싫지 않다. 털 고르기는 사람, 원숭이, 오랑우탄 할 것 없이 영장류가 서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불안감을 달래며, 신뢰를 쌓는 행동이다. 스타일이 얼마나 멋지게 나오는지와 무관하게 이 과정에서 현우는 미수제과의 일원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은자 언니는 방금 튀긴 도넛에 슈가 파우더를 팡팡 뿌려 미수, 현우와 나눠 먹는다. 현우는 자진해서 늦게까지 빵집 일을 거들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함께 장식하고, 마침내 세 사람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미수제과는 현우의 등장으로 충만하고 활기가 넘치는 곳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행복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량해 보이는 친구들이 미수제과에 죽치고 앉아 과거를 들먹이며 현우를 괴롭히고, 장사를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수와 은자는 현우를 사랑했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흔들리고 가게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견디기가 어렵다. 결국 현우는 알바비를 가불 받아 친구들을 데리고 나간다. "쟤 안 올 거 같지?" 미수는 현우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직감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때는 1997년 겨울. 우리나라는 IMF로 기억되는 경제 위기를 지나고 있다. 미수제과점은 폐업했고 은자는 지하시장에서 수제비 장사를 하고 있다. 대학 졸업반인 미수는 얼어붙은 취업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선택지는 단 두 가지. <유열의 음악 앨범>을 제작하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2개월 아르바이트로 일하거나, 어느 중견기업의 사보 제작팀에서 정직원으로 일하거나. 미수는 라디오 방송 일에 훨씬 끌렸지만,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직장이 절실했기에 사보 제작을 선택한다. 취업이 확정된 날 불 꺼진 미수제과 앞에 서있던 미수는 기적처럼 현우를 마주한다. 어떤 할머니를 업어서 집에 모셔다 드리는 중. 현우는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숨 가쁘게 달려 미수에게 돌아온다.


현우는 검정고시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미수는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은자 언니의 소식을 전하며 내일 수제비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는 미수. 안타깝게도 내일 현우는 군입대를 한단다. 굽이 진 골목길과 비탈길을 걸으며 둘은 다시 만나 얼마나 반가운지 솔직한 마음을 나눈다.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던 미수는 아쉬움에 현우를 다시 부른다. 내일이면 입대를 하는 현우와 첫 출근을 하는 미수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잠이 든다. 미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천리안에 접속해 현우의 이메일 계정을 만든다. 옛날 옛적 이메일을 천리안으로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때가 바로 그때다. ID는 두부1001, 비밀번호는 미수의 학번. 길을 나서며 미수는 현우 손에 이메일 정보를 쥐어 주는데, 실수로 비밀 번호를 빠뜨린다.


비밀번호를 빼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 미수는 현우에게 이메일을 계속 쓴다. 귀마개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소음이 심한 공장에서 다른 직원들과 똑같은 잿빛 작업복을 입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업무에 지쳐가면서,  틈틈이 현우에게 이메일을 쓰는 일이 그나마 미수의 숨통을 틔워준다. 하지만, 그 메일은 '읽지 않음' 상태로 차곡차곡 쌓여만 가고, 미수가 이사를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유일한 방법은 현우가 비밀번호를 알아내 메일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미수는 <유열의 음악 앨범>에 '도넛'이라는 이름으로 사연을 보내 '두부'의 이메일 비밀번호가 자신의 학번이라고 알려주기도 하지만 현우에게는 가 닿지 않는다. 미수가 떠난 집에 군복을 입고 찾아와 하염없이 기다리는 현우의 모습이 얼마나 짠한지! 휴가를 나왔을 때도, 제대를 했을 때도 현우는 미수의 옛집을 찾아오지만 둘은 만날 수 없다.




드디어 IMF 경기침체의 터널을 빠져나온 2000년. 두 사람이 만났던 동네에는 그 사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미수제과가 있던 자리는 부동산이 차지했다. 그리고... 햇살이 눈부신 어느 봄날 미수는 드디어 비밀번호를 찾았다는 현우의 이메일을 받는다. 현우는 미수가 살던 집을 계속해서 찾아가다가, 그 집이 월세로 나온 것을 보고 바로 계약을 했다. 그 과정에서 먼저 세입자였던 미수의 현관 비밀번호를 알게 되는데, 그 현관 비밀번호 역시 미수의 학번이었던 것이다! 3년 동안 미수가 보낸 이메일을 밤새워 읽은 현우는 드디어 미수와 통화에 성공하고, 그날 저녁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 장면에서 나오는 BGM이 핑클의 <영원한 사랑>인데, 이 노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번에 알았다.


이제 드디어 두 사람이 알콩달콩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할 찰나, 현우는 일하고 있던 피트니스센터에서 봉변을 당한다. 삶이  불운했던 현우가 볼 때 말도 안 되게 쉬운 돈벌이. 피트니스 회원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격려하면서 "이렇게 하고도 돈을 받느냐?"며 의아스러워 한다. 아니나 다를까. 현우는 입회비만 챙겨 달아난 사장 덕에 피해자들에게 몰매를 받고 경찰에도 끌려가게 된다. 과거 현우를 미수제과에서 끌고 나간 친구들의 소개로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 자꾸만 발목을 잡는 이 친구들과 악연에서 현우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봉변으로 미수를 바람 맞힌 현우. 이메일로 사정을 설명해 보려 하지만 자신의 구질구질한 처지에 화가 나 창을 닫아 버린다. 미수는 연락이 되지 않는 현우를 원망하는 대신 차라리 잘 되었다며 이메일을 보낸다. 지금 자신은 너무나 후진 상태. 현우를 만나서 웃고 떠들 상태가 되지 못하니 좋은 일이 있으면 그때 만나자며 눈물을 삼킨다. 근래 있었던 가장 좋았던 일이 현우가 비밀번호를 풀었던 일이라는 고백과 함께.

  



시간은 또 흘러 2005년. 두 사람의 형편은 이제 좀 나아졌을까? 다행히 그랬다! 미수는 이제 공장을 벗어나 어엿한 출판사에서 일을 하며, 기획한 책을 홍보하러 <유열의 음악 앨범>을 방문하기도 하고, 바로 그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다. 아직도 <유열의 음악 앨범>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미수. 미수의 출판사 사장은 위층의 스튜디오 공간을 대학생 영상 창작 집단에게 빌려주는데, 현우가 마침 그 집단의 멤버였다. 현우는 영상 제작 분야에서 자기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었던 것.


어렵게 재회한 두 사람은 어색하기 그지없는데, 이때 현우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미수를 예전 살던 동네로 데려간다. 현우는 다행히 다말증 환자가 아니어서, 가는 내내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미수가 살던 집. 한때는 미수의 집이었던 곳에 현우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둘 사이의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지고 8년의 세월을 이어온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오래전 미수가 내어준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를 현우가 입었던 것처럼, 이제는 현우의 츄리닝 바지와 꼬깃한 티셔츠를 미수가 입는다. 입대 전날 미수가 현우에게 내주었던 하이트 맥주는 캔을 따자 사방팔방으로 뿜어져 나왔는데, 이번에 현우가 내주는 하이트 맥주는 얌전하게 잘 들어있다. 미수가 현우를 자기 집에 들였을 때는 급하게 감추고 치워야 할 것이 많았는데, 현우가 미수를 데려왔을 때는 감추어야 할 것도 치워야 할 것도 없다. 제발 멀쩡하게 좀 살고 싶었던 현우가 혼자서 얼마나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수제과에서 세 사람이 찍었던 크리스마스 사진과 아파트가 들어서고 부동산으로 변해 버린 옛 미수제과 자리의 사진이 현우의 방에 "살면서 좋았던 몇 안 되는 장면"이나 "뺏기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미수와 함께 했던 순간들과 미수가 살았던 이 집이 현우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두 사람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곳에서 현우와 미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 은자 언니에게 인사까지 마치니 이제 미수제과 3인방은 다시 완전체가 된 것 같다.




악연이란 잡초처럼 질기다. 미수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현우에게 과거의 친구들이 연락을 해 온다. 현우가 고등학생 시절 옥상에서 장난을 치다가 정엽이라는 친구가 추락해서 죽는 일이 있었다. 그때 정엽이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 현우였다. 친구가 눈앞에서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끔찍한데, 현우는 누명을 쓰고 소년원에 가게 되었다. 현우가 막 미수제과에서 살아갈 희망을 찾았을 때 나타났던 친구들이 그때 옥상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다. 사건 이후 각자 집을 나와 오토바이로 음식 배달 등을 하며 지냈던 친구들은 자포자기한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어떻게든 멀쩡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현우를 고깝게 여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정엽의 10주기를 핑계로 친구들은 다시 현우를 데려간다. 정엽의 유가족에게 대표로 돈봉투를 전달하게 하고 비난을 받게 만든다. 현우는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유가족의 싸늘한 저주뿐. 현우는 이 모든 것을 미수에게 비밀로 하고 싶지만, 미수는 태성이라는 친구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된다. 분노한 현우는 태성을 멀리 쫓아버리기 위해 거칠게 주먹다짐을 하고, 상처가 가득한 모습으로 은자 언니에게 찾아간다. 할머니도, 고모도, 선생님도 믿어주지 않을 때, 은자 언니는 현우를 믿어 주고 품어 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였을 뿐인데, 두 팔을 벌려 환대해 주었던 은자 언니는 엄마 같고 고향 같은 사람이었다. 은자 언니가 끓여주는 수제비를 먹고, 돈을 벌면 빵집을 차려 주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현우가 떠났다.


미수는 자제심을 잃은 현우를 보고 마음을 정리한다. 현우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불안하게 살고 싶지 않았던 미수는 경제력과 자상함을 갖춘 출판사 대표에게 마음을 열어보려고 노력한다. 미수와의 나이 차를 의식한 듯 일부러 과장되게 철없어 보이는 행동을 하는 대표는 미수제과점이 있던 자리에 베이커리를 열고 근처에 쿠킹 클래스를 열자는 사업 계획까지 제시하며 미수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현우와 동료들에게 2층 작업실을 비우라고 통보하여 사실상 연적인 현우를 제거하려고 한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현우와 대표는 게임이 안 되는 상대. 대표는 현우가 작업실 천정에 붙여놓은 미수의 사진을 제멋대로 가져가 버린다.


미수와 작업실을 동시에 잃게 된 현우. 출판사 대표의 차를 멈춰 세워 미수의 사진만이라도 되돌려 달라고 한다. "저는 대표님이 싫었어요." "난 자네가 좋은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현우와 늙은 여우처럼 노련한 대표의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인상적이다. 바쁘다며 현우를 무시하고 차를 출발시키는 대표. 뛰어가 미수를 만날 수 있는지 묻는 현우. 관광객으로 가득한 북촌한옥마을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두 사람이 가로지른다. 한 명은 미끈한 마세라티를 운전하면서, 다른 한 명은 발로 뛰면서. 관광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채와 양산을 손에 든 무더운 여름날. 현우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저 차를 따라가면 미수를 만날 수 있을지 몰라!


현우의 예감대로 대표는 어느 베이커리 앞에서 미수를 차에 태운다. "미수야!" 목청껏 불러 봤지만, 미수는 현우를 보고도 차에 오른다. 다시 이어지는 추격전. 한옥마을의 길은 굽이굽이 오르락내리락. 전력 질주하는 현우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인다. 대표는 울먹이는 미수를 보고, 늙은 여우답게, 잠깐 차를 세워줄지 묻는다. 차에서 내리는 미수를 보며 땀범벅이 된 현우의 상처 투성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다가온 미수를 덥석 껴안고 현우는 처음으로 말해본다. “사랑해 미수야. 사랑해." 그런데 미수는 현우를 밀어내며 말한다. "뛰지 마. 현우야. 제발 뛰지 마. 다쳐." 분명 뛰지 말라고 말했는데 나에게는 그 말이 사랑한다로 들렸다.


현우는 그 자리에 고개를 숙이고 서서, 두 팔을 아래로 드리운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엄마나 선생님께 야단맞은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운다. 차로 돌아와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미수. 한여름 뙤약볕 아래 어린아이처럼 울며 서 있는 현우. 번쩍이는 마세라티가 미끄러지듯 멀어져 갈 때, 무늬 하나 없는 흰 티셔츠에 긴 청바지를 입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서서 울고 있는 현우의 모습이 너무나 슬퍼서 내 마음이 아려왔다.




출판사 담벼락에 가을빛이 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은자를 찾은 미수는 현우가 다녀간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흔들린다. <유열의 음악 앨범>은 아직도 미수의 하루를 여는 라디오 방송. 오늘은 보이는 라디오가 처음 시도되는 날이다. 보이는 라디오를 촬영할 사람으로 현우를 추천해 주었었는데, 정말로 현우가 방송을 촬영하게 되었는지 자신은 없다. 포스트잇에 현우의 모습을 그려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보는 미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방송이 시작되고 유열이 불러 보고 싶은 이름들을 나열하는데, 마지막 이름이 김미수이다.


그렇다. 현우가 예정대로 보이는 라디오를 촬영하러 간 것이 틀림없다. 사무실을 조용히 빠져나온 미수는 택시를 타고 여의도를 향한다. 길이 막히자 중간에 내려 뛰기 시작하는 미수. 방송이 끝나고 현우가 사라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별로 없다. 북촌한옥마을의 골목을 심장이 터질 듯이 달렸던 현우처럼 여의도로 이어지는 한강 다리를 미수가 달린다. 노란 원피스를 휘날리며 긴 머리는 땀에 절었지만, 다행히 너무 늦기 전에 방송국에 도착. 헝클어진 긴 머리를 정돈하며 미수가 간신히 얼굴을 내밀자, 현우가 장비를 챙겨서 나온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사람. 현우는 카메라를 꺼내 머리는 산발에다 화장은 땀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더없이 아름답기만 한 미수의 얼굴을 찍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첨밀밀]과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들이 나에게는 ‘로맨스’의 가장 중요한 인자들이 아닌가 한다.


두 영화의 첫 번째 공통점은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는 운명적 사랑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것도 우연이며, 불가항력에 의해 자꾸만 헤어지지만 어쩐 일인지 또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쯤 되면 이 두 사람은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며, "얘들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그런 이야기이다.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형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러브 스토리가 이런 유형 아닐까 한다.


두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가족이 없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두 사람의 집안이 오랜 원수지간이거나, 혹은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처럼 두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로맨스 스토리에서 집안의 반대는 가장 흔한 사랑의 장애물이다. 그런데 [첨밀밀]과 [유열의 음악 앨범]에는 두 사람의 부모나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첨밀밀]에서는 소군(여명)과 이교(장만옥)가 부모를 떠나 홍콩에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Comrades(동지): Almost a love story인 이유다. [유열의 음악 앨범]에서도 현우의 할머니, 고모가 한번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불행한 사고 이후 현우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유추된다. 미수에게는 은자 언니가 있지만, 혈육이 아니라는 언급이 나온다.


세 번째로, 가족 대신 청춘의 불안함과 가난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첨밀밀]의 소군과 이교는 타지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중국 본토 출신인 두 사람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리라는 꿈을 안고 반환 직전인 홍콩에 왔지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이교는 N잡러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양심에 걸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주식과 외환에 투자했다가 힘들게 번 돈을 몽땅 날리는가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해적판 음반을 팔아 떼돈을 벌려다가 쫄딱 망하기도 한다. 반면 순진하고 우직한 소군은 느리고 둔해서 이 험한 세상에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교는 소군을 좋아하면서도 자꾸만 밀어낸다. [유열의 음악 앨범]에서 현우는 고등학교 시절 불행한 사고로 날개가 꺾인 젊은이지만, 검정고시와 아르바이트로 삶을 개척해 나간다. 대학생인 미수는 졸업을 앞두고 IMF 경제 위기가 찾아와 빵집은 폐업하고 취업의 길도 막막하다. 은자 언니마저 "이상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 이런 "후진 상태"에서는 현우를 만나도 웃고 떠들 수 없는 불안함 때문에 숨어버린다. 그 시절 신해철의 노래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를 들어보면 "내 불안한 미래를 함께 하자고 말하긴 미안했기에"라는 가사가 나온다. 젊은이에게 불안함이란, 어떻게든 스스로 이겨내야할 청춘의 본질같은 것인데, 그 불안함이 청춘의 연애에서 큰 장애가 된다.


네 번째는, 바로 위에 이야기한 이유 때문에 "돈도, 권력도, 나이도 많은 남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다. 말하자면 젊음의 불안함을 한방에 해결해 줄 남자다. [첨밀밀]에서는 표형이라는 조직폭력배 두목이, [유열의 음악 앨범]에서는 출판사 사장이 젊고 불안한 여자 주인공에게 "안정적인 삶"이라는 당근으로 유혹한다. 이러한 클리셰는 현실에서도 상당히 힘이 있는 것이어서, 이교는 표형과 결혼까지 하고 미수도 대표의 차를 타고 현우를 떠나간다. "김중배의 다이아가 그렇게도 좋더냐"고 항의 한번 못해보고 쓸쓸히 남겨진 소군과 현우를 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른다.

  

다섯 번째로, 두 사람의 사랑에 배경이 되어 주는 가수가 있다. [유열의 음악 앨범]에서는 유열이라는 가수가, [첨밀밀]에서는 등려군이 이들의 만남에 함께 한다. 미수와 현우는 <유열의 음악 앨범> 첫 방송을 배경으로 삼아 처음 만나고, 이메일 비밀번호 때문에 서로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유열이 방송에서 미수가 보낸 사연을 읽어준다. 유열의 라디오 방송이 보이는 라디오를 시도할 때 미수는 현우를 촬영기사로 추천하고, 유열이 현우를 대신해 미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미수는 현우와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첨밀밀]에서는 소군과 이교가 등려군이라는 가수의 팬으로 설정된다. 등려군은 홍콩에서 한물 간 가수인데, 그녀의 노래를 듣는 것 자체가 본토 출신 뜨내기라는 편견까지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남의눈을 신경 쓰는 이교와는 달리 소군은 등려군에 대한 팬심을 공공연하게 보여준다. 홍콩에서 우연히 만난 등려군에게 달려가 소군이 티셔츠 등판에 사인을 받는 것을 보고 그 순진무구함에 이교가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이교가 떼돈을 벌어보려고 등려군의 해적판 음반과 포스터를 팔다가 쫄딱 망할 때에도 순진한 소군이 일손을 돕는다. 뉴욕에서 혼자된 이교가 길을 가다 들려오는 등려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는데, 그 자리에 소군 역시 멈추어 서면서 두 사람의 마지막 재회가 이루어진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요)과 첨밀밀(달콤해)이 흘러나오면서 분위기를 이끌어가기도 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뻔한 러브 스토리이기도 한데, 두 영화는 다른 뻔한 영화들과는 달리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베토벤의 <운명>을 수많은 오케스트라가 수없이 연주를 해도, 그중에 유난히 더 잘 된 연주가 있는 것처럼 뻔한 러브스토리 중에 이 두 영화가 내게는 특별히 훌륭한 로맨스 영화로 느껴진다. 여러분의 최애 로맨스 영화는 무엇인지, 어떤 장면이 특히 인상적인지 궁금하다.




이대로 끝내기 아쉬워서 덧붙이는 사족.


[유열의 음악 앨범]에서 특별히 인상적인 장면을 적어본다.


1. 현우가 미수제과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감방에 다녀온 게 맞는지 질문을 받는다. 이미 밀가루와 설탕 포대를 두 손으로 들고 있던 현우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자, 은자가 주방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사실상 감방에 다녀왔다는 대답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받아주는 모습에 현우는 얼마나 감사했을까.


2. 은자의 수제비집에는 천정에 매달아 놓은 바구니에 돈을 담는다. 은자의 남편이 바구니에서 만 원짜리를 챙기고 천 원짜리는 돌려놓은 후 가게를 떠나는 장면이 있다. 은자 혼자 수제비 빚어 힘들게 번 돈을 남편이 챙겨가는 것 같다. 미수가 그렇게 반대했는데도 이상한 남자랑 결혼했다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있는데, 은자의 그 이상한 남편이 다른 건 몰라도 인물은 훤칠하다. 현우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잘 생겼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은자의 취향은 잘 생긴 남자였나 보다.  


3. 미수의 머리를 만져주던 은자가 현우의 머리에 무스를 발라 스타일링을 해준다. 그 시절의 헤어스타일이긴 한데, 사실 유난히 촌스러운 스타일의 은자가 현우의 머리를 어떻게 망칠지 조마조마하다. 보다 못한 미수도 나서 보는데, 가늘고 긴 두 팔을 쭉 뻗었다 접는 장면에서 미수의 넘치는 의욕이 느껴진다. 거울을 보겠다고 우기는 현우와 볼 필요 없다는 은자의 실랑이가 재미있다.


4. 현우와 미수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점등하고, 미수, 은자, 현우 세 사람이 가게 안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각자는 모두 외로운 사람들인데, 셋이 함께 있으니 그렇게 든든하고 충만할 수가 없다.


5. 미수가 살던 집에 현우가 군복 차림으로 찾아온다. 한 번은 휴가를 나온 듯하고, 한 번은 제대를 한 듯한데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그 차이가 느껴진다. 오지 않을 미수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현우 머리 위로 눈이 펑펑 내리는데, 보는 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


6. 현우가 드디어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헌책방 컴퓨터를 향해 달려갈 때,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마침내 그동안 쌓인 이메일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나도 기뻐서 현우와 같이 방방 뛰고 싶다.


7. 현우가 자기 집으로 미수를 데려갈 때 무슨 일인지 얘기해 주지 않고, 자기 혼자 콩당거리는 가슴으로 뒤돌아 볼 때. 뭔데 뭔데 빨리 말해, 어지럽단 말이야.


8. 아기처럼 땀에 푹 젖어 잠든 미수가 현우의 품을 파고들면 현우가 팔베개를 해준다. 이건 정말 심쿵.


9. 북촌한옥마을에서 현우가 출판사 대표의 차를 뛰어서 쫓아갈 때, 뛰기만 하는데 왜 이리 슬픈지. 나도 눈물샘과 땀샘이 폭발하는 것 같다.


10. 뛰지 말라는 미수의 말에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우는 현우. 두 주먹 꽉 쥐고, 고개 푹 숙이고 다섯 살 꼬마처럼 운다. 우리 현우한테 누가 그랬어!!! 보듬어 주고 싶은 엄마 마음이 울컥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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