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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Oct 13. 2022

나 없이도 잘 지냈다는 말이 주는 위안에 대하여

어린아이, 거동이 힘든 노부모, 또는 반려견을 누군가에게 맡겨  적이 있는지? 나는 출산   만에 갓난아기를 보모에게 맡기고 학교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반려견을 애견호텔이나 지인에게 맡기고 수차례 여행이나 출장을   있고, 이제는 구순의 노모까지 요양원의 돌봄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나의 소중한 존재를 돌보아 달라고 맡기는 마음은 여간 무거운  아니다. 마땅히 내가 해야  일을 돈으로 대신한다는 죄책감, 제대로  돌봄을 받고 있는지 하는 불안감, 내가 아닌 남의 손에 맡겨진 이에 대한 미안함..... 이런 불편한 감정들이 나를 옥죄어 오곤 한다.

 

볼 일을 마치고 허겁지겁 아이를, 반려견을 데리러 가면 돌봄을 제공하는 분은 언제나 "아주 잘 지냈어요"라고 말해준다. 흔적이 남을 만한 특별한 사고가 있었던 게 아니라면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잘 지냈다고 말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로는 아이의 표정이나 반려견의 행동이 "왜 이제야 데리러 오는 건가요?"라고 항의하는 것 같아도, 보통은 잘 지냈다는 말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식사도 콧줄을 통해서 하시니 몸이 축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막내딸의 얼굴을 알아보시지도 못하는 거 같은데, 요양원 분들은 잘 지내고 계시니 아무 걱정하지 말란다.


'잘 지냈다'는 이 형식적인 말이 나에게는 성의 없는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학교 다녀온 사춘기 자녀에게 오늘 학교 어땠냐고 하면 "Good!" 한 마디 던지며 방문 닫고 들어가 버리는 그런 대화가 떠올랐다. 그런데 최근에 일어난 작은 사건을 계기로 잘 지냈다는 이 말이 수행하는 중요한 기능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남편이 집에 있었고, 나는 하루 종일 나갔다 들아오는 길이었다. 반려견은 현관으로 나와 잠시 열렬한 환영인사를 한 뒤, 금방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잠잘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 남편이 하는 말이 "이제 좀 마음이 놓이는가 보네. 하루 종일 엄마 없다고 얼마나 안절부절 못 하는지 몰라."였다. 나는 전날 장거리 운전을 한 데다 그날도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던 탓인지 그 말이 무척 거슬렸다. 안 그래도 분리불안 반려견을 두고 외출하는 일이 늘 마음 불편한데, 굳이 나 없는 동안 강아지가 안절부절 못 했다고 알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더러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란 말인가? 싶으면서 짜증이 밀려왔다.


오매불망 나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존재는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가족처럼 돈을 주고받지 않는 관계에서 돌봄을 해줄 때면 그날 남편이 했던 것처럼 잘 지내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반려견을 작은 언니에게 맡기고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고, 큰 언니가 코로나 격리병동에서 어머니의 간병을 도맡았을 때도 그랬고, 어린 조카를 어머니가 맡아 키워 주실 때도 그랬다. 돌봄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시시콜콜 전하기도 했지만, 특히 불편하고 힘들었던 얘기들을 강조해서 돌봄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던 것이다.

  

반면, 어린 아이든 노모이든 반려견이든 돈을 지불하는 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때면 늘 잘 지냈다는 말을 들었다. 돌봄 서비스에 돈을 지불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나는 계약을 잘 이행하였다"는 의미로 "잘 지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식 된 입장에서야 어머니가 잠은 잘 주무시는지, 목욕은 얼마나 자주 하는지, 바깥바람도 정기적으로 쐬시는지, 기분 상태는 어떠신지 알고 싶다. 하지만, 구순 연세에 매일매일이 좋을 수는 없고, 자세히 알려줄수록 자식에게는 걱정거리만 늘어날 것이다. 잘 지냈다는 한 마디는 단순히 "나는 할 도리를 다 했어요"라는 의미도 있지만, 자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배려가 담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요양원에서 "어머님이 잠도 잘 못 주무시고, 몸무게는 많이 줄었고, 총기와 기력도 하루가 다르게 빠져나가지만, 낙상 사고나 감염병 같은 불상사는 없었으니 그만 하면 잘 지내신 거에요"라고 연민 가득한 말투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면 어떨까? 어머니를 두고 돌아오는 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형제 중에 누군가 일을 그만두더라도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냐, 비용 부담이 되더라도 더 좋은 요양원으로 옮기는 게 어떤가 하는 가족회의가 열릴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어린이집 선생님께 "엄마 보고 싶다고 한번 울었고, 기저귀가 젖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한참 만에 갈았고, 점심 메뉴가 입에 맞지 않는지 조금밖에 안 먹었고, 낮잠 시간에 안 자고 돌아다녀서 다른 애들에게 방해가 되긴 했지만,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세세히 알려주니 고맙기도 하겠지만,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휴직이니 퇴사니 하는 단어들을 수백 번 떠올리지 않겠는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들이 웬만해서는 "잘 지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귀찮아서 혹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의 손에 맡기는 사람이 걱정 없이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배려의 측면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나 노부모를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대부분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직접 돌보는 것과는 다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오늘도 잘 지냈다"는 한 마디는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죄책감, 불안감,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걱정 없이 자기 일에 매진해도 좋다고 조용한 응원을 보내 준다.


p.s. 오늘도 다양한 돌봄 서비스에 종사하시는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4zfacTKyZ7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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