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논문의 세계에는 Publication Bias(출간 편향)란 것이 있다. 가설이 지지된 연구가 그렇지 않은 연구에 비해 학술지에 게재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연구 가설이나 이론이 실제보다 훨씬 더 견고하게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출간된 논문만 읽어서는 어떤 이론이 100% 가까운 확률로 지지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연구를 해보면 이론이 틀렸다고 말해주는 데이터가 많다. 다만, 이런 데이터는 논문으로 출간되지 못하기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내 친구 하나는 박사 논문을 쓰다가, "내가 여태 읽은 논문들 다 거짓말 아냐? 그 논문들에서 썼다는 방법 그대로 따라 했는데, 나는 전부 기각이잖아!!" 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다행히 학위 논문은 가설이 기각되었다고 해서 탈락되지는 않고, 친구는 무사히 학위를 받았다. 어쨌든 치밀하게 설계하여 수행한 연구라 할지라도 연구 가설이 지지되지 않으면 학술지에는 게재되기 힘들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출판업계도 유사하게 작동한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팔릴 것 같지 않으면 출간되기 어렵다. 출판사는 책이 팔려서 수익을 창출해야만 사업을 이어갈 수 있으므로 당연히 가급적 많이 팔릴 책을 기획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느낄 만한 직업,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물의 이야기들이 책으로 출간된다. 돈 많이 버는 방법, 취업과 사회생활에 성공하는 방법, 건강하고 아름답게 사는 법... 그러다 보니 출간된 책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빛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클릭 수가 곧 돈이 되는 유튜브도, 팔로워 수가 곧 영향력의 크기인 인스타그램도, 시청률이 곧 성공의 지표가 되는 TV 프로그램도 비슷한 논리로 콘텐츠를 제작한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보는 책, 유튜브, TV 등의 콘텐츠는 모두 "대중의 입맛"이라는 하나의 지휘봉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브런치는 다르다. 출간을 하겠다는 뚜렷한 목적 없이 순수하게 글쓰기에 매달리는 나 같은 생초보 작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새 출발을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또는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쓰기로 작정한 사람들 말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화려하거나 아름답거나 희망차지는 않을지 몰라도, 나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재벌, 정치인, 연예인, 천재가 아니라도 충분히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브런치에는 가득하다.
어떤 생물학도의 대학원 생존기, 사회학 전공자가 진로를 찾아가는 이야기,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를 아직도 극복 중인 마흔 살 가장의 이야기, 대기업 임원이었다가 하루아침에 학원 상담실에서 차가운 김밥을 삼키는 여성의 이야기, 출산을 앞두고 유방암 진단을 받은 젊은 엄마의 투병기, 한국어를 배우러 온 외국인 학생들의 이야기, 힘들게 들어간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어린 아들의 돌연사와 그 상실 극복의 이야기... 그다지 화려하거나, 웃기거나, 자극적이지는 않아도 이런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이 나는 참 좋다.
가까이 지내는 분 중에 아들이 생물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한 분이 있다. 원래도 말이 없는 아들인데, 대학원을 가더니 말 한마디 섞을 기회가 없다고 답답해하셨다. 자정이 넘어서야 간신히 집에 오는 날이 많고 그러니 아침에는 늦잠을 잔다. 옷차림도 또래의 회사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추레한 차림이다. 그분은 이런 아들이 걱정도 되고 속상하여 하소연을 하셨다. 나는 남편이 대학원생일 때 그런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나름 이해시켜 드리려고 노력했지만 한계가 많았다. 그러던 중에 죽다 살다 돌아온 대학원생이라는 브런치북을 발견하고 그분께 링크를 보내드렸다. 아들의 생활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후로 나는 어떤 삶이 궁금해지면 브런치에 검색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직접 만나기 힘든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 내가 가본 적 없는 도시나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나와 내 가족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질병과 싸우는 사람들,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통해 나의 지평이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자본주의 논리로 편집되지 않은, 조금 거칠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담긴 이야기들에 매력과 감동을 느낀다. 얼마나 다양한 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보면서 내 삶에 대한 불만도 어느 정도 수그러들고 오만한 마음도 사라진다.
한없이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던 연구년도 이제 백 일 남짓 남았다. 아쉽고 후회되는 점은 말하자면 끝이 없으니, 잘한 일만 두 가지 꼽아 보면 첫째가 브런치를 시작한 것이고 둘째가 강릉에서 혼자 살아본 것이다. 강릉살이가 둘째인 이유는 시한부였기 때문이다. 반면 브런치는 지속형이다. 학교로 복귀하게 되면 브런치에 글 쓸 시간은 줄어들겠지만, 글감은 더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아이도 대학생이 되어 내 품을 떠나게 되면 더더욱 글을 써야만 하는 순간들이 늘어날 것이다. 브런치에 오면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하다. 나도 이곳에서 오래오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며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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