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숍의 목적은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줄이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는데,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작품을 보는 행위의 목적은 작품의 이미지를 서로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이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실마리로 삼으면서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하는 것, 모르는 것, 그 전부를 한데 아우르는 '대화'라는 여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감상과 해석이 같지 않다고 해서 상대방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고, 그 덕에 내 내면의 바다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도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것을 다시 이야기하게 될지 모른다. 그날 우리가 그랬듯이.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오랜만에 북서울미술관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진행 중인 다른 어떤 전시보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라는 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선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나는 너를'도 아니고, '나는 나를'도 아니고, '나는 우리를'이라니.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누구일까 궁금했다.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점도 좋았다. 왠지 모를 말랑말랑함을 기대하며 미술관으로 향했다.
전시실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시선을 압도하는 강렬한 작품 한 장이 걸려있었다. 이지양 작가의 〈피겨#1〉라는 작품이었는데, 작품의 피사체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집필한 김원영 작가였다. 변호사이자 공연창작자, 무용수인 그는 전시 끝 무렵에도 몸동회의 〈사랑체조: 바라보기 연습〉이라는 영상 작품에 등장한다. 휠체어를 타고, 비장애인들과 안무를 맞추며 단순한 동작 하나하나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서로 다른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지만, 개인과 개인이 만나 어우러지는 몸짓을 선명하게 담아낸 그 영상을 꽤 오래도록 관람했다.
이번 전시는 내가 생각한 것만큼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다. 전시 제목에 담겨있는 '우리'는 서로 다른 몸과 마음을 가진 개인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는 '우리'였다. 집단화된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다른 개인들로 연결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였다. 인종, 국적, 성별, 나이, 신체적 조건, 성적 지향, 사회문화적 환경, 경제적 상황 등 다양한 이유로 억압과 차별을 받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주자, 난민, 인종, 여성, 장애, 성정체성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혐오, 사회적 문제 등을 사진, 회화, 영상, 조형물, 음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작가들은 소수자를 집단화하지 않고 개별의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전한다. 예술을 통해, 취약한 개인이 자신을 긍정하고 서로 다른 몸과 마음을 가진 개인으로 구성된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수자는 사회의 주류 질서나 규범에서 벗어나거나 특정한 소속으로 규정되지 못하는/않는 존재를 아우르는데, 대중교통 탑승과 같은 일상적 차원뿐만 아니라 이민이나 결혼과 같은 제도적 차원, 전쟁 및 재난과 같은 사회 정치적 사건 등에서 빈번하게 소외되어 위협을 겪고 있는 이들이다. 사실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지,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나 또한 어떤 상황, 어떤 무리 안에서는 소수자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전시실을 가만히 걸으며 작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게 이토록 버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도 있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해는 작품의 의도라기 보다는, 이 고통의 깊이를 과연 내가 어디까지 소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해였다. 걸음이 자꾸 더뎌졌고, 쉬어가는 구간이 필요할 정도로 무겁고 먹먹한, 한편으로는 징그럽고 무섭기도 한 전시였다.
우연히 알고, 우연히 방문한 것치고는 깊어도 너무 깊은 거 아닌가.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올라오는 걸 꾹꾹 눌러 내리느라 버거웠다. 걸음이 자꾸 느려졌는데, 다행히 전시실 곳곳에 벤치와 휴식공간과 낮은 평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전시장 내 모든 공간이 휠체어로 이동 가능했고, 저시력자 및 시각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음성해설, 촉각모형과 청각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자막해설도 제공하고 있었다. 심지어 리플릿도 점자로 되어있었다. '연결'과 '환대'라는 키워드로 기획된 전시인 만큼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준비한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전시를 이렇게 오랫동안 관람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꽤 오래 그 공간에 머물러있었다. 그럼에도 하루 만에 다 소화하기에 벅찬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지난 주말 그곳을 다시 찾았다. 첫 번째로 방문했을 때, 미처 다 소화하지 못한 작품들을 천천히 다시 둘러보았다. 더 오랫동안 감상하고, 더 오랫동안 생각에 젖어있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한 인물의 영상에서 마음이 먹먹해졌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제작된 어떤 작품(발명품)을 보면서는 소름이 돋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못 했다. 미성년자는 관람할 수 없는 공간의 존재에 살짝 의아했지만, 그곳에 들어서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이건 나이대에 따른 차별이 아닌, 가치관 정립을 위한 배려라고 여겨졌다. 음성으로 마련된 공간에서는 가만히 헤드폰을 쓰고 작가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한참을 앉아있기도 했다. 무엇 하나 단숨에 지나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다. 하나하나 의미가 깊었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묵직한 단어들이 전시장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8월 중순부터 시작됐던 전시였는데, 나는 왜 이 전시를 이제서야 알았을까. 문화 예술 활동을 좋아한다면서, 그동안 너무 안일했던 건 아닌가 싶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세상이 놓치고 있는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이토록 선명한데,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싶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자꾸 마음이 울렁거렸다.
요즘 읽고 있는 여러 책(병렬독서를 좋아한다) 중에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라는 책이 있다. 이번 달 독서모임의 지정도서인데, 공동리더님이 고르신 책이다. 책에 등장하는 시라토리 겐지는 선천적 전맹으로 시각의 기억이 거의 없고, 맹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미술 작품을 볼까?'라는 생각을 가볍게 누르고, 그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이 책의 저자인 가와우치 아리오는 그와 2년이 넘도록 미술관을 함께 다니며 작품을 감상했고, 그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시의적절하게 이번 전시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 더 몰입하며 읽는 중이다. 모임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책을 이렇게 또 알아간다. 러닝크루라는 말처럼, 리딩크루의 힘을 다시 한번 체감하는 중이다.
끝으로 전시회 리플릿에 담겨 있던 여러 문장 중 마음에 콕 닿았던 문장 하나를 남겨본다.
"우리는 이 나라에 늘 있었던 존재다."
-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