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놀이면 좋겠다만

by 내민해
만약 나에게 묻는다면 예술은...... 예술은 뭘까?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예술은 뭔가를 만드는 것이고 나는 '삶'을 만들어가는 데 관심이 있으니 예술은 삶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술은 사랑하는 것을 재료로 삶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면 변화 없이 삶이 만들어지기는 어려우니 '일상생활에 깃든 변화의 가능성을 찾는 것'. 이것도 예술의 정의에 대한 대답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 정혜윤



작년 봄에 개봉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영화 <콘클라베>를 이제서야 챙겨 봤다. 언제부턴가 독립영화만을 줄곧 즐겨왔던 터라 오랜만에 찾은 상업영화가 너무 자극적이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한동안 멍해있었다. 단순히 좋았다, 나빴다라기보다는 여러 각도에서 충격이었다. 종교란 대체 무엇이고, 성직자란 또 무엇이며, 흠이 없는 인간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것인가.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더러운 걸 손에 묻힐 수밖에 없는 것인지(타인으로 인해 더럽혀지거나 자신의 절제력이 사라지거나), 인간의 욕망이란 어디까지인지, 고결한 인간이 존재하긴 하는지... 머릿속에 온갖 질문이 떠다녔다. 나는 사실 단장이자 주인공인 로렌스가 (돌고 돌아) 결국 그 자리를 맡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추측마저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래서 더 좋기도 했다(나의 편견이었으니까).


그리고 재미있는 건(이걸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참...) 현실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로렌스가 된 기분이라면 지금 내 입장이 충분히 설명 가능하리라 믿는다. 나는 25살 때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했었고, 몇 번의 이직을 경험했지만, 지금의 직장에서만 올해로 8년 차에 접어들었다. 수평적인 조직 특성상 보직을 맡지 않아도 되는 구조라 제안이 들어와도 번번이 거절해왔다. 비단 내 직무뿐만 아니라 회사 내 존재하는 여러 기구에서의 제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전면에 나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걸 넘어 싫어하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구석 어딘가에서 묵묵히 누군가를 서포트하는 걸 좋아한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심도 없다. 스스로에게만 주인공이면 됐지,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내가 주인공이야!"라고 외치고 싶지도 않다. 생각만해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부담스럽다. 그래서 어떤 조직에서든 리더를 맡는 걸 꺼려했다. 거절이 익숙했고 역할이 주어지는 게 싫었다. 직장에서도 가늘고 길게 살겠다는 모토 하나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내 직무를 좋아하지만 이 직무를 평생 할 수 있을 거라는 애정이 들지는 않았다. 적당히 잘하고, 적당히 좋아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이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거절했을 텐데, 이제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콘클라베>의 로렌스와 같은 상황이 돼버렸다. 단 한 번도 직책을 맡는 자리를 욕심낸 적이 없는데, 그 자리를 수락하는 것만으로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욕심을 새롭게 알게 됐다는 말이 아니다(저도 싫다고요). 나 외에 다른 이들의 욕심을 엿보게 됐고 그 과정에서 놀랐다. 그럼에도 내가 맡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 속이 쓰렸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조직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없지만, 어느 공동체에서든 자유롭게 떠다니는 사람이고 싶은 내 성정상 직책을 맡는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콘클라베>에서도 상황에 떠밀려 후보들에게 오해를 사고, 비난('실은 너도 그 자리가 탐났지!'라며)을 당하는 로렌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다 답답했는데(욕심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도 없고), 지금 내가 딱 그 심정이다. 대안이 없다, 대안이. 절차대로 차근차근 인사발령이 나겠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은 여전하고, 그 중심에서 나는 예술을 외쳐보려 한다(응?).


1월 독서모임에서는 장강명 작가님의 『먼저 온 미래』라는 책으로 모임을 진행했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가님이고, 오랫동안 출간을 기다려왔던 책이라 모임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많았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좋았다. 모임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고 깊은 시간이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의견들이 흥미로웠고, 건강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라 안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문장은 '가치가 기술을 이끌어야 한다' 였는데, 이 문장에는 이런 질문들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좋은 가치란 무엇일까?', '가치가 기술을 이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준비해 간 발제문에도 이 질문들을 담았고 명쾌한 답을 내지 못했던 내게 한줄기 빛 같은 문장을 전해주신 분이 계셨다.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가 가치다'


이 문장을 받아 적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내가 자주 생각했던 지향점과 맞닿아있는 문장이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낙관하자는 문장처럼. 낙관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라고 자조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는 마음의 형태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없다는 게 인간과 AI의 다른 점이기도 하고.


다른 질문으로는 '각자가 생각하는 예술의 정의'도 있었다. 이 질문은 사실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나에게 예술이란 무엇일까, 더 정확히는 나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가. 앞서 수집한 문장처럼, 책을 덮고 삶을 열다의 정혜윤 작가는 '예술은 사랑하는 것을 재료로 삶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책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문장이라 생각했다(이 문장 외에도 감미롭고 다정한 문장들이 많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본다. 나에게 예술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예술이란 삶의 이유나 목적 같은 거창한 의미라기보다는 숨 쉴 틈에 가까웠다.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닮아있었다. 솔직히 말해 예술을 향유한다고 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보상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덕분에 무언가를 순수하고 정성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이 예술에서는 가능하다(+사랑). 본업이 싫다는 게 아니라 본업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내 삶의 곳곳에 예술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일 테다. 꼭 어떠한 작품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도 모두 다 예술이 될 수 있다 여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삶을 더 풍요롭고 경이롭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가치들. 나에게는 그게 예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둑은 예술일까, 아닐까? (라고 다시 또 개미지옥 같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는 건 아니다) 직장에서 고단했던 마음을 단단하게 위로해 주는 게 나에게는 예술이었고, 그 중심은 책, 더 정확히는 문학이었다. 문학을 읽을 때 자유로웠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내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배워갈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나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오래된 문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은 피할 수 있었다.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다. 피했다가는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차라리 내가 해야겠다 싶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인생이 늘 그렇듯 예측이 어렵다. 이럴 때마다 자주 품는 단어가 있다. 바로 낙관. 그러니 낙관하자. 비록 삶이 고단할지라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