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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Nov 11. 2019

언니, 세상에서 처음 만난 친구

당신이 내 언니라서 고맙습니다.


토요일 오전, 독서모임에서 주최하는 저자 특강을 들으러 간 사이 서울에서 엄마를 모시고 작은언니 내외가 집에 들렀나 봐요. 지인의 결혼식에 가려던 길이었는데 예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근처의 저희 집에 들렀다는 겁니다. 독서 모임을 마치고 뒤늦게 허겁지겁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까지 합세해서 결혼식에 가고 아무도 없더군요. 


주방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냉장고 문이 잘 안 닫혀 있는 걸 발견했어요. 남편이 뭘 또 잘 못 넣어서 냉장고 문이 이런 건가 하고 열어 봤거든요. 못 보던 김치통이랑 반찬통 여러 개가 들어있더군요. 엄마랑 언니가 가져다가 넣어 놓은 거였어요. 주방 한쪽 구석에는 새 수건 보따리도 있고, 쉽게 먹을 수 있는 1회용 국물 팩도 잔뜩 있었습니다. 


결혼식 가려던 길에 시간이 남아서 들렀다고 하기에는 바리바리 싸서 가지고 온 짐들이 너무 많았어요. 저에게 반찬을 전해 주려고 작정하고 서둘러서 집을 나선 게 분명했습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에 들어왔다가 침대 위에서 뭘 발견했는데요, 한눈에 알아봤지요. 마른빨래가 개켜져 있었습니다. 제가 요즘은 소파에 빨래를 안 쌓아두고 대신 침대에 쌓아둡니다. 생각날 때마다 한두 개씩 접어 놓거나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때에는 쌓아 놓은 것 속에서 몇 개씩 골라서 입거든요. 


저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점점 부족해지면서 '어차피 매일 갈아입는 옷인데 옷장에 넣을 필요 뭐 있어? '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마른빨래를 개켜서 옷장에 넣었다가 필요할 때 도로 빼내 펼쳐서 입는 대신 쌓아두고 하나씩 골라 입으면 어떨까?' 중간의 과정 몇 단계가 생략되니 시간 절약 효과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실 빨래 개키는 시간이 걸려봤자 얼마나 걸리겠어요? 귀찮음과 게으름 병이 도질 때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시간 절약 변명을 댄 거죠. 요 며칠 또 그 병이 도졌는데 불시에 엄마랑 언니가 집에 들러서 그 쌓아놓은 빨래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이 차곡차곡 개어놓은 침대 위의 빨래를 보니, 미리미리 좀 해놓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팔순 넘은 노모와 쉰이 훌쩍 넘은 언니가 같이 늙어가는 딸이자 동생의 빨래를 개켜 준다는 건. 제 입장에서 좀 많이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그러고 나서 집을 둘러보니 어수선하더라고요. 토요일 새벽, 독서모임을 위해 집에서 나올 때는 늘 제 한 몸 빠져나오기도 바쁘거든요. 조금 더 시간 관리를 제대로 해서 살림을 단정하게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대충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결혼식이 끝나고 카페로 가는 중이라고 말이죠.  





트리플 스트리트의 커피빈에 갔더니 엄마와 작은언니 내외, 남편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더군요. 저희 엄마가 굉장히 정정하셨는데 요즘 기운도 빠져 보이고 늙으신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그런 엄마가 막내딸 집에 들르셔서 빨래 개켜 놓은 걸 떠올리니 또다시  반성하게 되었지요.  


엄마에게 김치랑 반찬은 왜 해 오신 거냐고 물었습니다. 작은언니가 다 해서 가져온 거라더군요. 저희 작은언니도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고등학생 아들 밤마다 학원으로 픽업 다니느라고 바쁜 사람이거든요. 그 와중에 동생 준다고 많은 반찬들을 해서 챙겨 왔을 걸 생각하니 또 미안해졌어요. 


제가 예전에 자매간의 이야기를 동화로 쓴 적이 있는데요, 9세 언니가 여동생을 미워하며 마음이 꽁꽁 얼다가 손과 발까지 꽁꽁 얼게 되는 '냉동 소녀 꽁꽁이'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동화를 쓰면서 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이 모든 아이들을 다 보살펴 줄 수 없어서 엄마를 세상에 보낸 거라면, 그 엄마가 바빠서 막내딸까지 보살필 수 없을 때를 대신해서 언니가 있는 걸 거라고 말이죠. 





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동화책을 썼고요, 작가의 말에도 썼어요. 언니는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 만난 첫 번째 친구라고 말입니다. 작은언니는 저한테 평생 동안 양보하고 챙겨주고 안부 묻고 위로해 주고 편들어 주는 사람이에요. 언니한테 많이 고맙습니다. 





카페에 도착해서 차를 마시며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그림과 조화를 이루는 벽이 참 예쁜 거예요. 갑자기 블로거 본능이 발동해서 일단 벽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 





저희 언니가 저더러 "어머, 얘. 저기 뭐가 있다고 사진을 찍어?" 묻더군요. 블로그에 올리려고 그런다고 해도 언니는 잘 이해를 못 하죠. 블로그에 뜬금없이 카페의 벽 사진을 왜 올려야 하는지 말입니다. 


블로그를 어떻게 운영하는 건지, 블로그로 뭘 하는 건지 전혀 모르는 언니지만요. 브런치가 글 올리는 플랫폼인지는 지금도 모르고 아침 겸 점심으로 먹는 식사로만 아는 언니지만요. 동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세상 둘도 없고요. 연세 드신 엄마의 일상을 아침저녁 시시각각 꼼꼼하게 챙기는 효녀 중의 효녀입니다. 세상을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무엇 하나 모자란 것이 없는 꽉 찬, 제 언니이기 이전에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갑자기 언니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근데 반찬 맛은 없을 거야."라고 말이죠. 사실 언니나 저나 요리 솜씨가 그다지 좋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언니가 준 반찬을 뭐 맛으로 먹나요. 정성스러운 마음 생각하면서 먹는 거죠. 


엄마와 언니 내외를 배웅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좀 쉬다가 저녁때 반찬통 뚜껑을 열고 언니가 만든 고구마 줄기 무침을 먹어봤어요. 웃음이 나더라고요. '어쩜 우리 집 딸들은 하나같이 요리 솜씨 좋은 엄마를 안 닮고 누구를 닮았나?'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맛나게 맛소금을 뿌려가며 언니의 반찬을 먹었습니다. 


언니가 해다 준 싱겁지만 양은 풍성한 반찬으로 당분간은 든든하고 편하게 밥상을 차릴 수 있을 거예요. 필요할 때마다 달려와 제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제 친언니라는 사실이 감사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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