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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24. 2019

남편의 장바구니 속에 든 것은?

당신의 배려. 감사합니다


요사이 할 일이 조금 많아졌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립니다. 글 올리자마자 아침 식사 준비를 해요. 남편의 셔츠도 다려야 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하려니 마음만 바빠요.


저는 살림을 잘하는 주부가 아닙니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잘하는 일들이 저절로 늘어나지는 않아요. 손에 조금 익숙해질 뿐이죠. 숙련도가 언제나 좋은 질을 담보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보면 그래요.


일단 요리를 잘 못하고요. 정리 정돈도 겨우겨우 하고요. 장 보기도 좋아하지 않아요. 마트 가서 물건을 고르는 일이 어느 때부터인가 좀 귀찮아졌어요. 게다가 체력 소모도 크거든요. 이 시간에 집에서 쉬든지 책을 보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듭니다.


어지간한 생활용품과 식품들은 전부 마트 인터넷 주문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코스트코는 배달이 안되잖아요. 남편은 코스트코 가는 걸 좋아합니다. 그리고 쇼핑하는 것도 즐기는 편이고요.


저는 옷을 사기 위해서 쇼핑하러 나가지는 않아요. 홈쇼핑 보다가 나쁘지 않으면 구매하는 편입니다. 반면에 남편은 직접 입어보고 재질도 만져보고 그래요. 솔직히 남편이 저보다 옷을 훨씬 더 잘 고르고 잘 입습니다. 자신한테 맞는 것이 어떤 건지 잘 알지요. 그러니 쇼핑하는 걸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저랑 반대예요.  



블로그 글쓰기. 책읽기. 자기계발 강의 듣기. 독서모임 등등 제 할 일이 늘어난 김에 남편에게 장을 봐 오라고 시킨 지 5-6개월쯤 됐나 봐요. 퇴근길에 코스트코에 가서 이것저것 사 오라고 하면 사 옵니다. 저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저는 남편만 보내요. 그 사이 저는 집에서 청소나 빨래를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지 않겠냐고 설득하죠.



최근에는 남편이 그 시간 아껴서 블로그에 댓글 달고 있는 거냐고 묻더군요. 네, 맞습니다. 블로그에 댓글도 달고 다른 이웃들에게서 필요한 정보도 모아요. 남편이 그래요. 자기도 가족 말고 '서로 이웃'하고 싶다고. '서로 이웃'들에게는 세상 더없이 친절하면서 남편에게는 장 봐오라고 하니까 농담처럼 그럽니다. (진담일 가능성도 많아요.)


그래도 어쨌든 남편은 장을 봐와요. 얼마 전 퇴근길에 물건들을 사 왔습니다. 아래 사진이 남편의 장바구니예요.



물건들을 꺼내는데... 양말은 안 보이더라고요. 얼마 전 아침에 블로그 글 쓰느라 정신이 없는데 남편이 양말 없냐고 묻는 거예요.


그날은 비가 많이 왔고 그러니 구두 안에 발목까지 오는 양말을 신겠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날이 더우니 덧신을 신고 다녔거든요. 갑자기 발목 양말을 찾을 줄 몰랐죠.


남편이 묻더군요. 그렇게 많이 사는 양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냐고요. 저도 모르겠어요. 양말이 집을 나가는 건지. 제가 남편 양말만을 골라서 내다 버리는 건지.... 제때 빨래를 딱딱 안 하면 갈아입을 옷들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아요.


"내가 양말을 아예 100켤레를 살게. 그럼 자기는 1년에 딱 세 번만 빨면 돼."


제가 빨래를 미루거나 살림을 대충 살아도 남편은 그런 것을 문제 삼은 적이 없어요. 요리를 못한다고 타박한 적도 없고요. 외부 환경이 조금 가혹해져야 제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텐데... 그렇지 않다 보니 제가 20년 넘은 주부이면서도 새댁 수준의 살림법만 구사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주부로서 살림을 꾸려나가는 일은 여전히 서툴지만... 그걸 감당해주는 남편과 딸아이가 고맙습니다. 맛없는 것도 먹어주고, 지저분해진 집도 견뎌주는 건.... 그게 좋아서가 아니라 아내를 엄마를 이해해 주기 때문이라는 걸 압니다.




남편이 코스트코에서 사온 베이글이에요. 딸아이는 양파 베이글을 좋아하고, 저는 블루베리 베이글을 좋아해요. 남편이 전화로 블루베리 베이글이 다 팔려서 40분 기다려야 한다더군요. 제가 다른 대체품으로 사 오라고 했어요. 시나몬 같은 것으로....


저는 그 사이 밥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는데요. 남편이 장 봐온 시간이 꽤나 늦어졌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40분 기다려서 와이프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베이글을 사 오느라 늦었던 거더군요. 제 시간이 소중한 만큼 남편의 시간도 소중한데 그 시간을 함부로 쓰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한 감정이 들었어요. 또 고맙기도 했지요. 하지만 늦고 둔한 손으로 땀 뻘뻘 흘리며 밥하느라 제 마음을 어제도 표현하지 못한채 지나가 버렸어요.



부부라는 이유로, 한 집에서 산다는 이유로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조심해야 할 민감한 말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성질을 엄청나게 부리는 날들도 많았어요. 남편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저와 딸아이에게 맞춰주는데... 저는 거의 대부분을 제 위주로 살아가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친구 남편 중에 기장이 있는데요. 8년 전쯤 같이 배드민턴을 쳤었거든요. 기장들은 비행이 없는 날은 집에서 며칠씩 여유시간을 즐길 수 있으니 와이프 친구들의 모임에 자주 나와요. 얼마나 친했으면 다 같이 운동도 했겠어요.


그 친구 남편이 저더러 '스님의 주례사'를 읽어봤냐고 묻더군요. 제가 주례사는 한번 들으면 됐지 뭘 굳이 또 찾아서 듣냐고 반문했었어요. 그래도 읽어보고 부부 사이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라고 와이프 친구들한테 날마다 얘기했는데 저는 들은 척도 안 했어요.



그로부터 한참 지나 제가 즐겨 듣게 된 유튜브의 '법륜스님'이 '스님의 주례사'를 쓰셨다는 걸 알게 됐죠. 저는 법륜스님이 개그맨보다 더 웃겨서 좋아하거든요.^^ 개인적인 취향이랍니다. (법륜스님. 김창옥...이런 분들 좋아해요.)


결혼할 때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해요. 첫 번째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할 뿐이지 상대에게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안 맞는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출발할 때는 양쪽에 맞는 건 10퍼센트고 안 맞는 게 90퍼센트에서 출발해서 결과는 공통점 90퍼센트, 차이점 10퍼센트를 목표로 만들어 가면 됩니다.  


<스님의 주례사> 55쪽  






세월이 흘러 그 '스님의 주례사'도 새 옷으로 바꿔 입으며 개정판이 나왔더군요. 친구 남편이 권할 때 미리미리 읽었다면 남편에게, 딸아이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었을 텐데 후회가 됩니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려고요. 너무 편하고 같이 산다는 이유로 실수하는 것들이 없는지 날마다 살펴보겠습니다.  


법륜스님이 들려주시는 부부간의 예의를 지키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 보겠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자꾸 남 탓하고, 남에게 화살을 돌리지 마세요. 내 인생의 행복은 내가 찾아야 하고, 내가 가져야 하고, 내가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그 사람이 아내든 남편이든 자식이든)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마음과 열린 마음을 내면 내가 좋은 거예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답답한 거예요. 타인을 미워하면 내가 괴롭습니다.


저 꽃을 보고도 좋아하면 내가 기쁜데 사람을 보고 좋아하면 내가 왜 안 기쁘겠어요.


날씨를 보면서 신경질 내면 누가 괴로워요? 내가 괴롭죠.


내나 남편을 보고 짜증을 내면 내가 괴로운 거예요.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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